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민 Feb 15. 2024

나만 없는 특기(特技)

"저는 모델로 참가할게요"

"TY랑 N군은 원래 카메라 포지션이니까 그걸로!"

“그럼 포스터 제작은 리코에게 부탁해 볼게”


다들 정해진 각 자의 포지션이 있었다. 다들 잘하는 특기(特技)가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이 나이 먹도록 특기하나 없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사진을 잘 찍는 것도, 디자인을 할 줄 아는 것도, 모델이 될 줄 아는 것도 아닌 애매함 투성이인 나는 뭘 해야 하는 거야 대체?


이 나이 먹고 어린 친구들에게 느끼는 동경과 질투가 뒤섞인 감정에 대한 부끄러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 숨기고 싶었지만 그게 내가 마주한 민낯의 감정들이었고 나는 받아들였다.


나름 욕심은 있었던지라 단순한 콘셉트 기획과 운영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나의 취향이 듬뿍 담긴 내 나름의 창작물을 만들어 전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당시 줄줄이 예정된 해외 출장과 바쁜 본업, 연인과의 헤어짐으로 체력도 멘탈도 탈탈 털려있던 나는 돈도 안 되는 이 일에 (오히려 사비를 털어서 하고 있는 이 일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중했다.


왜냐면 그냥 내가 하고 싶으니까.


다른 명분은 더 필요 없었다. 스스로 내 삶을 컨트롤하고, 나의 의지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는 그 기분을 다시 한번 더 느끼고 싶었다.






어찌 됐든 한번 걸쳐보자


이 시기에 나는 음악 믹싱에 빠져있었다.


평소에도 대중적으로 소비되기 전의 곡들을 디깅 하여 주변에 추천하고 그때 얻는 지인들의 반응을 통해 만족감을 얻던 나는 일종의 자기만족으로 믹싱을 시작했다. 무에서 창작까지는 못해도 나만의 DJ 믹스를 만들어 좋은 곡들을 주변에 널리 알리고 그 장소에 알맞은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바로 여기서 이번 전시회의 콘셉트가 나왔다. 어떻게든 창작적인 측면에서 내가 조금이나마 걸칠 수 있는 요소를 찾고 찾다가 사진과 음악을 콘셉트로 잡은 것이다. 사진에 음악이 더해지면 얼마나 더 풍부하게 전시회를 잘 즐길 수 있겠는가!


믹싱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줄 자신도 없었고, 회사 일도 너무나 바빴지만 뭐든 닥치면 하게 되겠거니라고 생각하며 미래의 나에게 맡겼다.




MIX+展


평소 레트로하고 따뜻한 필름 감성의 사진을 찍는 TY

좀 더 아트적이고 다양한 촬영 기법과 편집 기술을 사용하는 N군


이 둘의 사진 스타일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여기서 문득 떠오른 생각 - 그래 다르니까 이걸 오히려 살려보자!


・도쿄의 서로 다른 장소가 주는 느낌을 생각하며 3가지 테마의 음악 믹스를 만들고

・카메라맨 2명과 모델 2명이 이 하나의 믹스를 바탕으로 받은 느낌을 각자 본인 스타일대로 표현하며

・사람들은 하나의 음악에 대한 각기 다른 표현 방식을 관람하는 것이다


개성 있는 아티스트들의 혼합이자, 음악 믹싱 속 혼합 그리고 음악과 사진을 혼합하여 종합적으로 눈과 귀를 충족시키는 전시회. 이렇게 나의 그리고 우리의 첫 전시회 MIX + 展이 정해졌다.


드디어 일이 좀 진행되는구나라며 한숨 놓고 맘 편히 해외 출장을 다녀올 수 있겠다고 뿌듯해하던 찰나 전체 스케줄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며 깨달았다.


'아 잠깐, 내가 믹스 만들기 전까지는 애들이 사진을 못 찍잖아? 제작이랑 홍보 기간도 포함해서 역계산하면 어디 보자... 출장 다녀오자마자 바로 믹스 3개 만들어야 하잖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을 어마무시하게 벌려놓은 것이다.



이전 03화 10살 어린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