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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민 Feb 06. 2024

30대도 받아주나요?


평범한 직장인이 멋지게 직장을 때려치우고 내 안의 꿈을 찾아 프리랜서로 전향하는 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 같은 내용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도 내 안에 먹여 살려야 할 아티스트를 가진 직장 생활 10년 차 평범한 회사원인 내가 도쿄에서 전시회를 열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겪은 안정과 이상 그 어딘가에서 느낀 감정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모두들 언젠가 한 번쯤은 느껴봤을 꿈에 대한 이야기이다.






매력적인 유혹, 안정감에 대하여


우리는 두둑한 보수에서 오는 금전적 안정감, 약한 업무 강도에서 오는 육체적 안정감, 인간관계의 스트레스가 없는 심리적 안정감, 소속감에서 오는 사회적 안정감을 뿌리치기가 힘들다.


나의 첫 직장은 위의 4가지를 어느 정도 모두 충족하는 그야말로 꿀 직장이었다.


안정적인 보수와 워라밸이 보장된 삶은 사실 꽤나 만족스러운 삶이었지만 조금도 변할 것 같지 않은 조직, 업무 시간에 카페테리아에서 낮잠을 자며 시간을 때우는 정년퇴직을 앞둔 사람들, 그에 반해 줄줄이 퇴사하는 능력 있는 젊은 사원들과 수동적이고 반복된 업무 루틴 속에서 나는 그야말로 현타를 제대로 느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율성과 주체성이 없는 일본식 기업 문화에 왠지 모를 무기력감을 느꼈던 듯도 하다.


몸은 너무나도 편했지만 마치 일하는 기계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고 매일 이곳에서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를 일을 하며 8시간씩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나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건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첫 직장을 7년 가까이 다닐 수 있었던 건 대기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거부하기 힘든 안정감 때문이었다. 두둑한 복리후생과 5시 칼퇴근이 퇴직이라는 결심을 하기까지 나를 7년이나 잡아두었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일에 대한 이상을 가진 반면 현실에서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포기할 자신이 없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해 볼 만큼의 강한 열정과 용기 그리고 밥벌이 해먹을 정도의 예술적 재능이 있는 건 아니라는 자기 객관화 정도는 되어있는 상태였던지라 그야말로 유혹적인 현실의 안정감을 외면하기가 더욱더 힘들었다.


그런 나를 불안하게 했던 또 다른 것은 또래 젊은 사원들의 줄줄이 사탕과도 같은 퇴사와 이직 소식. 모두들 자신의 일에서 원하는 게 명확히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더 높은 연봉, 명확한 커리어 목표 혹은 자기 사업을 하고 싶다는 욕망.


이 맘 때쯤 나는 일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고민을 엄청나게 하기 시작했다.


- 지금 회사 나쁘지 않은데 그렇다고 좋아 죽지는 않아.

- 계속 일하며 커리어 탄탄하게 쌓는 건 좋지만 회사에서 승승장구한다고 해서 그다지 기쁠 것 같지도 않아.

- 내가 누리는 모든 걸 버리기는 싫고 그렇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까지는 없어.


그야말로 누릴 건 다 누리고 어느 하나도 놓치기 싫은 놀부 심보였다. 더 좋고 나에게 더 잘 맞는 세계가 어딘가에 있겠지만 그 세계가 어떤 세상일지, 나에게 맞는 환경일지, 괜한 욕심 탓에 충분히 좋은 환경을 버리고 후회하지는 않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도대체 나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이며 밥벌이해 먹고살기 위한 일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했다.


이러한 치열한 고민의 과정은 나에게 새로운 회사로 이직할 용기와 더불어 내가 동경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적극적인 액션을 취할 용기를 주었다.



30대도 받아주나요? 


“아니 내 이야기 좀 들어봐, 하.. 이걸 신청해 말아? 진짜 딱 내가 찾던 거긴 한데.. 내가 지금 대학생들이랑 이걸 하는 게 맞아? 아니다 아니야.. 전제 조건이 달랐네 이 할미를 받아주기는 하려나?"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크레이티브 한 일을 하며 사진, 음악, 영상,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함께 무언가를 하고 싶어 며칠간 미친 듯이 검색을 하던 찰나에 딱 내가 원하던 커뮤니티를 찾았다. 전공자나 업계 사람도 아니고 주변 지인들은 모두 일반 회사원 밖에 없는 내가 창작물을 만드는 일을 그것도 일본에서 누군가와 도모하려고 하니 적절한 커뮤니티를 찾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음.. 여긴 업계 사람들이 정보 공유하는 모임인 듯하고.. 여긴 너무 취미 레벨로 그냥 사진만 찍으러 다니는 곳이고”


아마추어인 나도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에 참여하여 최종적으로 영상이나 사진과 같은 하나의 창작물을 만들고 싶은데 프로들은 굳이 나와 무언가를 같이 할 이유가 없고, 이런 창작에 목마른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도통 보이질 않았다. 그렇기에 며칠 동안의 집요한 검색으로 알게 된 이 커뮤니티가 나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 커뮤니티 일본의 10대, 20대 청춘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크레이티브 커뮤니티라고 한다. 여기서 하는 여러 가지 프로젝트들이 정말 딱인데 직장인 사회인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 어디 없으려나 싶었지만, 그래도 학생과 사회인을 대상으로 크리에이티브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다 같이 작품을 만들고 전시회를 하는 곳이라고 하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호기롭게 지원 신청서 작성을 클릭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지원 양식 마지막 란의 연령대를 고르는 곳에 30이라는 숫자는 카테고리에 있지도 않다. 나는 내가 아직 많이 젊다고 생각했는데 첫 단계부터 거스를 수 없는 물리적 숫자에서 막혀버리니 당황스러운 마음에 친구에게 신세 한탄 겸 연락을 한 것이다.


“난 우리가 아직 많이 젊다고 생각했는데 30대는 쳐주지도 않는 게 너무 충격이야.. 별건 아닌데 괜히 서럽네"


그렇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궁금하면 연락 오겠지 안되면 말고 에라 모르겠다의 마인드로 출근 몇 시간을 안 남긴 일요일 저녁에 나는 그렇게 지원 신청서를 제출했다.


나름 쿨하게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나도 참 어지간히도 들어가고 싶었나 보다. 그 뒤로 연락은 대체 언제 오려나 싶어 수시로 휴대폰 확인만 했다. 일주일 가까이 지나도 오지 않던 연락에 그래 10살 이상 차이나는 사람이랑 같이 뭘 하기가 충분히 부담스러울 수 있지라며 아쉽지만 혼자 뭐라도 해보자고 마음을 먹고 있던 터였다.


조금은 울적한 마음을 달래던 찰나에 울린 SNS 알람 - TY님이 친구 신청을 했습니다.


커뮤니티 매니저에게 드디어 연락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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