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의 편지

by 하나

마릴라 아주머니, 잘 지내시죠?


초록 지붕 집은 여전해요. 창밖으로 더욱 커진 벚나무도 보이고 자줏빛 라일락 향기도 올라오네요. 초록 지붕 집에서 처음 맞는 아침은 세상을 무작정 사랑할 것만 같았는데. 오늘은 사랑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아침이네요. 그래도 여전히 햇볕이 반짝이는 날엔 기분이 좋아져서 고통을 견디기 더 쉬우니까. 아주머니가 초록지붕 집을 떠나시던 그날도 이런 햇볕이 쏟아졌어요. 오늘의 화창함은 아주머니가 저에게 보내주신 선물이라 생각되었어요.


아주머니, 어제는 좀 울적했어요. 아주머니가 힘들어하시던 그날 밤이 자꾸만 떠올랐거든요.

'아주머니가 좋은 곳에 가셔서 행복하게 지내실 거다.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것이다. 아주머니가 웃고 계시다.' 아무리 좋은 것을 상상해보아도 소용이 없었어요. 언제부터인가 상상의 힘은 약해지고 상상을 끝내기도 쉬워졌어요. 그런 생각들로 가라앉아 있는 저를 보고 옆 반 선생님이 말했어요.


"앤, 너는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몰입되어 있는 것 같아. 이 마을 사람들에게 한결 같이 은혜에 보답하는 착한 앤 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같단 말이야.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붙일 필요가 없어.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되는 거야. 네가 너와 가족의 미래를 위해 초록 지붕 집을 떠나야 할 이유가 생겼다면 그렇게 하면 돼."


화가 났어요. 내가 남의 시선에 안달 난 사람이라니요. 저는 그저 아주머니를, 아저씨를 정말로 그리워하는 것뿐인데요. 이 초록 지붕 집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 소중한 곳이기 때문인데요. 내가 이 집을, 라일락을, 벚나무를, 개울가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인데요. '하얀 환희의 길'과 '반짝이는 호수'에서 떨어져 지내는 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을 뿐인데요. 그 생각 때문에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슬퍼졌지요.



그때 한동안 조용하던 코델리아가 "짜잔~"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났어요. 분홍색 내복 바지에 분홍색 재킷을 걸치고, 어깨에 자기 키만 한 분홍색 캔버스 백을 맨 채로요. 머리는 또 어떻고요. 분홍색 알이 박혀있는 왕관이 얹어져 있었어요. 팔찌에 목걸이까지, 가지고 있는 액세서리는 죄다 몸에 치장한 것 같았어요. 물론 모두 분홍색으로요. 상상이 가세요? 정말이지 우스꽝스러웠다고요. 너무 웃겨서 이불에 얼굴을 묻고 꺽꺽 웃었어요. 코델리아는 엄마가 왜 웃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으니까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잠시 후 제가 물었어요.


"코델리아, 우리 핑크 공주. 핑크가 그렇게 좋아?"

"응! 난 핑크가 제일 좋아!"

"그럼 코델리아. 엄마가 좋아, 핑크가 좋아?"

"둘 다!!"

"진짜? 코델리아, 엄마가 좋아, 핑크가 좋아?"

"둘 다..... 아니야! 엄마! 엄마가 좋아."


보고 있던 신랑이 말했어요.

"코델리아, 그럼 아빠는? 아빠가 좋아, 핑크가 좋아?"

"음......."


신랑과 저는 얘좀 보소 하는 표정으로 서로 바라봤어요. 코델리아가 심각하게 망설이는 거예요. 그러더니 말했지요.

"핑크!!"

"뭐?! 아빠보다 핑크가 좋아? 아빠는 핑크에 밀렸네~~ 아이고~"


코델리아는 너무 해맑게 웃으면서 그렇다고 대답했죠. 신랑은 조이와 리오를 양 무릎에 앉힌 채로 있었는데 코델리아의 그 당연하고, 해맑은 대답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어요. 엄청나게 깔깔 웃어댔죠. 그러는 아빠를 보고는 조이와 리오가 말했어요.


"나는 빨간색 제일 좋아하는데, 빨강보다 아빠가 더 좋아."

"나는 아빠랑 비교할 수 있는 거가 없어."


아주머니, 불안하고 슬픈 마음을 아이들 덕분에 덜어내었어요. 아주머니도 어디선가 듣고는 웃으셨겠죠?

아이들처럼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이들 대답에 상처받지 않는 것처럼 상대의 말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해 보았어요. 순수한 아이의 마음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타인의 생각이나 마음을 이리저리 재어보지 않고, 내 맘대로 가늠해보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좀 더 쉬워질까요? 아니면 어른의 말은 좀 더 깊이 있는 해석을 덧붙여야만 그 진심을 알게 되는 것일까요? 옆 반 선생님은 분명 저를 위해서 한 말이겠지요.


언젠가 린드 아주머니께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마음에 곧바로 떠오른 것이 가장 멋진 거라고, 그래야 가장 좋다고, 멈추어서 다시 한번 생각을 했다가는 망치고 만다고 했었는데요. 글쎄요. 어른이 되고 나니 나의 진리가 모든 세상의 진리는 아닐 수도 있구나 하는 겸허함을 배우게 됩니다. 또 영혼이 통하는 친구를 찾기는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도요. 그래서 더욱 아주머니가 그리워지는 밤입니다. 많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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