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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늘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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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Dec 14. 2018

셋. 토스트와 사과잼

평일 아침, 나는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다. 첫째, 둘째 아이가 아빠와 함께 등교하고 막내를 준비시켜 등원시키고 돌아오면 그제야 나의 아침식사가 시작된다. 근 몇 년 동안 지속되어 오는 나의 루틴(routine)이다. 아직 도움이 필요한 나이의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 정말 열 번쯤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서게 되는 것 같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거구나 하고 진심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좀 허기가 지더라도, 배가 고프더라도 웬만하면 아침에는 아이들과 겸상을 하지 않는다. 그저 옆에서 아이들의 시중을 들뿐이다. 썰물처럼 가족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나면 어느새 아침 햇살이 식탁에 마중 나와 있다. 홀로, 그러나 햇살을 벗 삼아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시간이다.


나의 아침 메뉴는 그때그때 달라지는데 오늘 아침에는 어제 사온 식빵을 토스트 해서 사과잼을 찍어 먹고 싶었다. 물론 나의 사랑, 캡슐 커피와 함께. 냉장고 안에 있는 사과잼을 꺼내었다. 사실 나는 딸기잼을 좋아한다. 사과잼 보다 딸기잼이 더 좋아와 같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사과잼은 내 돈 주고 사본 적이 없다. 어디에서 생겨나게 돼도 좀처럼 그 뚜껑을 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간혹 큰 맘먹고 인심을 써 혀 끝을 잠시 내어준다. 그럴 때마다 '아니야, 잼은 역시 딸기잼이지.' 하는 생각을 하곤 하는 것이다. 그럼 이 사과잼은 왜 나의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것일까? 이 사과잼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내가 직접 만든 수제 사과잼이다. 이쯤에서 사과잼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가 왜 직접 사과잼을 만들었는지 그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야겠다.


 나란 여자는 사과잼은 안 좋아해도 사과는 엄청나게 좋아한다. 그런데 식감에 민감한 편이라 푸석거리는 사과를 싫어한다. 한 입 베어 물면 아삭하고 소리가 나는, 그러면서도 달달함이 입안 가득 고이게 되는 그런 사과를 좋아한다. 누구나 다 그러려나? 내가 지금까지 미국에서 먹었던 대부분의 사과는 내가 좋아하는 아삭함과 단단함을 가지지 못했다. 그나마 Fuji사과가 한국 부사와 비슷한 식감을 가진다. 어느 날인가 마트에 갔는데 애들 주먹만 한 귀여운 햇사과가 나와있었다. 예전에 아는 언니가 농장에서 따온 햇사과라며 가져왔는데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다. 완전하게 단단하지는 않지만 신선함과 새콤 달콤함이 동시에 녹아있었다. 그때 생각이 나서 덜컥 햇사과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집에 와서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그만 너무 실망하고 말았다. 내가 아는 전형적인 미국 사과 맛. 나도 안 먹고, 애들도 안 먹고, 신랑도 안 먹는 맛과 식감이었던 것이다. 다들 입은 고급져 가지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었다. 상하지도 않은 멀쩡한 음식을 버리는 것은 불특정 다수에게 너무도 죄스러운 일이었다. 저걸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다 사과잼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내 입맛대로 만드는 사과잼은 그래도 괜찮겠지 싶었다.


사과 껍질을 깎아내고, 아주 작은 조각으로 자른다. 넉넉한 냄비에 넣고 적당량의 설탕을 넣는다. 그리고 한참을 끓인다. 열심히 저어가면서. 설탕이 녹아내리며 사과의 즙과 섞인 향이 코를 홀린다. 평소와 다르게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젓다가 레몬즙도 약간 넣어준다. 가만있어보자, 사과잼에는 계피가 들어가야 하는데. 내가 사과잼을 왜 좋아하지 않는가 생각해보니 그것이었다. 시나몬, 난 시나몬 향을 안 좋아하는데 그 향이 너무도 진했던 것이다. 계피를 넣지 않은 사과잼 맛은 어떨까 하고 졸이고 있는 사과를 먹어 보았다. 아, 이건 신기하게도 뭔가 빠진듯한 맛이다. 부족한 맛이다. 좋아하지 않지만 약간의 계피 가루를 넣기로 한다. 톡, 톡, 톡. 이 정도면 되었다. 잘 섞어 조금 더 졸인 다음 다시 맛을 본다. 음, 뭔가 아까와는 다른 감칠맛이 난다. 잼에게 감칠맛이라는 표현이 적당한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빠진 것 없이 다 들어가 있는 듯한 맛이었다. 적어도 내 입에는. 충분히 졸여내고 유리병에 채워 넣는다. 작은 병으로 두 개가 나왔다. 다 만들어진 사과잼에서 계피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과잼이다. 이제 사과잼을 열어 덜어내고 토스트와 함께 먹으면 되겠다. 앗, 이거 또 이런다. 사과잼 뚜껑을 열 수가 없다. 저번에 먹고 귀찮다고 입구 부분을 대충 닦아 잠갔더니 이러나 보다. 왜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까. 뭐 이런 철학적 반성을 하며 수건과 숟가락을 동원해보고 이리저리 돌려본다. 아, 진짜 먹고 싶은데 사과잼. 신랑을 불러야 하는 걸까. 사과잼 먹자고 신랑까지 부르는 건 진짜 너무 오버지. 이런 생각으로 거의 포기할 즈음 뚜껑이 돌아가는 그 미세한 느낌이 찾아왔다. 그리고 뒤이어 '뽕'하는 경쾌한 소리도 따라왔다.


한참 동안 실랑이 끝에 얻어진 나만의 사과잼을 하얀 종지에 담아낸다. 식빵을 조금씩 잘라내어 사과잼을 푸욱 찍어 입에 넣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식빵에 문질러 바르지 않고 찍어 먹는 것. 이 행위는 소박하다 못해  보잘것없어 보일 수 있는 토스트를 더욱 고급진 음식으로 만들어주는 느낌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함께한다. 나 혼자 조용히 사과잼 맛을 음미해본다. 참 달고 맛나다. 딸기잼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 맛이구나. 마중 나왔던 해님이 먹구름에 가려졌다. 갑자기 어두워진 식탁을 마주해도 소리 없이 미소 짓게 만드는 그런 맛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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