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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Jan 08. 2019

미치도록 사랑했고,
싫은 것들이 생겨났다.

아이들을 다 재워 놓고 남자가 수업 준비를 하는 동안 여자는 옷방 불을 켜고 주저앉았다. 박스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여자와 남자가 연애하던 때 주고받았던 손편지들이다. 10년도 더 된 손 때 묻은 우리의 흔적들.


언젠가 남자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헤어지자 말했을 때 그는 여자에게 말했었다. 


"지금까지 받은 편지도, 함께 찍은 사진도 하나 남김없이 처리했어. 다 버렸다고!"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절망했다. 그가 정말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진짜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결혼 후 남자의 시골집에 내려가 짐을 정리하다 잊고 있었던 저 편지 더미들을 발견했을 때 여자는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들이 거기 남아있는 것에 큰 행복과 안도감을 느꼈다. 하나가 되기 위한 희로애락의 발자취들이 박스 하나에 담겨있다.


박스 안에 즐비하게 들어앉은 지난 시간들을 무작위로 건져 올려 본다.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고 곱게 접힌 종이를 편다. 마침내 수많은 과거들 가운데 한 컷이 열린다. 글씨를 따라 움직이는 여자의 눈동자가 열기를 뿜어낸다. 마치 생일 선물 꾸러미 앞에 앉아 발갛게 상기된 아이들의 그것과 같다. 


별걸 다 기억하는 여자.

민감성이 우월한 종자에 속하는 여자는 정말 세세하게 별걸 다 기억했더랬다. 반면 남자는 무디기 무뎌 여자가 별별 걸 다 기억해내면 두 눈 똥그랗게 뜨고 놀래곤 했더랬다. 그런데 여자도 나이를 먹는가 보다. 아니면 정말 아이를 많이 나아서 그 특별한 능력이 너무 빨리 소실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떠올려보는 옛 시간들은 여자가 기억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들로 뒤죽박죽이다. 여자가 이 지경이니 남자는 말할 나위 없다. 


너와 내가 했던 대학 생활. 그 안의 활기, 열정, 고민들. 자주 갔었던 커피숍, 밥집, 동네 뒷산. 정말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은 에피소드들. 참 어렸구나 싶은 감정의 소모전. 스무 살 언저리에 했던 나와 너의 말들. 나와 너의 꿈들. 끝없는 사랑고백. 유치하기 그지없는, 참으로 맹목적인 사랑 노래.


"철순아, 생일 축하해. 태어나줘서 고맙고, 잘 자라서 내 앞에 나타나 줘서 고마워."


매 년 남자의 생일 때마다 여자는 지치지 않고 똑같은 사랑 고백을 했었구나. 정말 미치도록 좋아했었구나. 


현실로 돌아와 남자와 여자는 나란히 앉았다.

"나는 그때 왜 그렇게 당신이 미치도록 좋았을까?"

"그럼 지금은 미치게 좋지 않아?"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남자와 여자가 담백하다 못해 건조한 대화를 한다. 둘 중 누구도 그것이 감정적으로 상처가 된다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때처럼 미치게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을 둘 다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여자는 남자가 그 말에 상처 받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남자 역시 말은 때때로 진실의 깊이를 다 담아낼 수 없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양치질을 하기 이해 나란히 섰다. 여자의 눈으로 커다란 거울 안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렇게 다정할 수가 없다. 여자가 급히 말을 바꾼다. 


"여보, 아니야. 그때는 미치도록 사랑했고, 지금은 덜 사랑하고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다만, 뭐랄까...... 그때는 자기한테 싫은 게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싫은 게 몇 가지 생겼다 정도? 예를 들면, 샤워하고 나서 머리카락을 정리하지 않는 거라든지, 양말을 뒤집어 벗는다든지, 이불 안에서 뀌는 방귀 같은 거."


그래. 여전히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사랑한다. 다만 예전에는 눈이 멀어 사랑을 했고, 지금은 눈을 뜬 채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서로 눈엣가시 같은 것들이 보인다. 미치도록 눈먼 자의 사랑을 했고, 눈뜬 순간 보기 싫은 것들이 생겨났다. 다시 눈을 감는다. 그러면 거기에는 여전히 미치도록 사랑하는 네가 서있다. 그러나 또 영원히 눈을 감은 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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