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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Jan 02. 2020

유서

바람이 되어 온 세상을 여행할 자격이 있을 만큼
가볍지도 대단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한아름의 땅과 하늘을 지켜내기 위하여
애를 쓰며 지냈음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살아내는 동안 늘 소망했던 것은
그리운 마음과는 상관없이 지나가는 좋은 계절과
곧 사라질 아침과 낮과 밤을 구별하는 냄새처럼
변하는 것들 속에서도 영원한 무언가를
내 곁에 붙잡아두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그 모든 것에 머무르게 되었으므로
삶에 허락되지 않은 일에 대한 크고 작은 소망이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누군가는 내가 사랑했음에도 나를 증오했고
누군가는 내가 증오했음에도 나를 사랑했지만
결국 나의 모든 순간에는 사랑이 있었으며
모든 순간은 각자의 키만큼 늘어진
한 사람만의 자리로 향하고 있었음을 느낍니다
험한 길을 넘어 또 다른 험한 길을 만났을 때에도
손을 잡은 사람의 눈을 보며 울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나를 깊게도 옅게도 잠들지 못하게 했던 몇 권의 책과 
마음껏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쓴 시 몇 편
주워 담지도 내어주지도 못해 늘 부둥켜안고 지냈던
소중한 사람들을 향한 마음이 전부입니다
이 시는 나의 무엇을 차지했을 당신을 위한 것이며
마음껏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시라는 점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를 지극히 사랑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면
밥을 먹는데 갑자기 네 생각이 났어
그런데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더라구.
같은 말로 허공에 편지를 써줄 수 있습니까
12월의 어느 출근길에 내 이름이 쓰인
우스꽝스러운 전광판 광고를 발견했을 때
저런 이름을 가진 사람을 알고 지낸 적이 있다.
고 생각해줄 수 있습니까


소풍 가는 길에는 되도록 떠오르지 않길
그저 숨 있는 것들 틈에 있기를 바란다면
이 정도의 잊지 않음은 괜찮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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