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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Jan 06. 2020

나의 첫 템플스테이 - 1

부처님은 마음 빨래 전문가

2019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내게 간절히 원하는 소망 따윈 없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였다. 감옥이나 수용소처럼 일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 희망은 독이 된다. 그러나 언제든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에게 희망사항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를 뜻한다.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었거나, 원하는 모든 것이 좌절된 상태. 내가 전자의 경우였다고 말하고 싶지만, 모든 것을 다 이룬 사람이라면 템플스테이를 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연말의 나는 ‘나’라는 문제아에게 쩔쩔매는 초짜 선생 같았다. 모든 것이 두려웠고, 그중에서도 나 자신이 가장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커피를 마시다가 별안간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새해가 되는 자정에 달님에게 회복을 기원하며 소원을 빌었고, 달님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대신 내게 ‘치유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난 더 이상 힘들지 않기를 바라지 않았다. 다만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기길 기다렸다. 하지만 복권 당첨을 아무리 빈다 한들 복권을 사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다. 어차피 더 이상 기다릴 핑계조차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복권을 살 차례였다. 내게 그 복권이 바로 템플스테이였다.


당첨 확률은 로또로 벼락부자가 되는 것보다는 더 높다고 생각했다. 해 볼만 한 게임이었다. 내가 템플스테이 장소로 선택한 곳은 충북 영동군에 있는 반야사였다. 첫 템플스테이 장소를 반야사로 선택한 이유는 ‘그냥’이다. 훌륭한 목수는 연장을 가리지 않는 것이지만 초심자는 일단 어떤 연장이든 쥐고 삽질을 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지역과 휴식형 프로그램으로 필터를 걸고 나니 반야사가 눈에 띄어서 예약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건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무래도 템플스테이 예약에 3개월치 행운을 몰아서 쓴 것 같다.


시간에 맞춰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황간 정류장에 내렸다. 시간이 없어 택시를 타기로 했다. 템플스테이 담당 팀장님께서 택시 번호  개를 알려주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촌이라 택시가   밖에 없다고 한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약국이 있는지  밖을 살폈지만  흔한 슈퍼도  보였다.  복용하는 노이로민이 전날  떨어져서 걱정이 됐지만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야사에 있는 동안 약은 필요하지 않았다.


반야사를 따라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있다


반야사에 도착하니 팀장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차담을 하며 템플스테이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알려주셨고 가벼운 대화를 했다. 어쩌다 이곳에 왔냐고 물으시기에 마음이 힘들어서 그렇다고 했다. 팀장님께서도  나이  마음이 고단해서 절에서 기도만 하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단다. 청춘의 시련은 세대를 초월하여 누구나 겪는 것인가 보다.


팀장님께서는 반야사에 있는 동안 ‘맹구우목(盲龜遇木)’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대해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맹구우목 모든 인간이 기적 같은 존재라는 가르침을 주는 말이다. 인간이 다음 생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확률은 눈먼 거북이가 100년에  번씩 숨을 들이쉬기 위해  위로 올라왔을 , 우연히 떠다니던 나무판자 구멍에 목이  확률보다  적다는 뜻이다. 또한 ‘일체유심조 모든 일이 마음에 달렸다는 의미인데, ‘맹구우목 함께 사찰에서 지내는 동안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하여 고찰할 만한 좋은 가르침이었다. 아무래도 팀장님께서 나를 위로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감사했다.


반야사 대웅전


차담 후에 짐을 풀고 절복으로 갈아입었다. 너무 편하고 좋았는데 방문객들이 자꾸 쳐다봐서 좀 부끄러웠다. 하긴 코에 피어싱 한 여자애가 절복을 입고 있으니 나 같아도 쳐다봤을 것이다.


곧장 대웅전으로 가서 팀장님께 불교 예절에 대해 배웠다. 큰절도 가르쳐주셨는데, 큰절을  때는 신체의 다섯 군데( 무릎・양손・머리) 바닥에 붙여야 하며 이것을 ‘오체투지라고 한단다.  이마를 바닥에서 떼기 전에 손으로 받드는 자세를 취해 부처님께 예를 갖추는 ‘고두례 해야 한다.


전에 라오스로 봉사활동을 갔을 때 주의해야 할 점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만지지 말 것’이 있었다. 많은 라오스 사람들이 불교를 믿는데, 불교가 탄생한 인도에서는 머리를 신체 중 가장 신성한 부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체투지는 부처님께 나를 지극히 낮추고 예를 갖추는 것이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은 약간 기분이 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오히려 오체투지를 할수록 마음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중에 108배를 하면서, 때때로 나를 낮추는 것이 되려 나를 높이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역설적인 생각도 들었다.


사찰 예절을 배우고 나니 저녁 공양까지 시간이  남았다. 그동안 문수전에 다녀오기로 했다. 팀장님께서는 반야사에 와서 문수전을 보지 않으면 반만 보는 거라며  가라고 하셨다. 가는 길이 힘들 거라는 말은  해주셨는데  이유를   같았다문수전에 가려면 보기만 해도 숨이 차는 수많은 계단을 올라야 했다. 한동안  먹지도, 깊이 자지도 못한 터라 체력이 많이 떨어졌는지 자주 쉬어야 했다.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에서 소피가 왕궁을  때도 수많은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는데, 마음을 겸손하게 가지라는 뜻이라고 했다. 어쩌면 문수전 가는 길도 같은 가르침을 주는 것일지 모른다.



중간중간 보이는 산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그때만큼은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어쩌면 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자연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구제불능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방법이 있으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문수전에 들러 큰절을 하고 나오면서부터 나도 나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는 것이다. 새해에 품은 첫 번째 희망이자 진실된 희망이었다.



하산 후 저녁 공양 전에 찻집에 들러 물을 마셨는데 난로 옆에 아주 어린 고양이가 지내고 있었다. 삼색 털과 순진한 눈을 가진 너무 귀여운 아이였다. 친해지고 싶어서 손을 내밀었는데 내가 싫었는지 후다닥 도망쳤다. 내일은 조금 더 친해지기를 바라면서 찻집을 나와 바로 공양간에 갔다. 소박한 식단이었지만 먼 길을 달려와 등산까지 하고 나니 허기가 져서 맛있게 잘 먹었다.


공양을 하고 나서는 스스로 사용한 식기를 닦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보시(布施)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보시는 단순히 내가 가진 것을 나눠주는 것뿐만 아니라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는 것까지 포함된다고 한다.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는 것이 진정한 보시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구류가 너무나 정갈했다


저녁 공양을 하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샤워를 하고 일찍 잠들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정신머리를 엿으로 바꿔 먹기라도 한 건지 내일 신을 양말도, 잠옷도 안 가져오고 안경과 헤어드라이기도 깜빡했다. 헤어드라이기는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사찰에 주로 계시는 스님들께선 머리카락이 없으므로 헤어드라이기를 쓰실 필요도 없었다… 일단 양말을 깨끗히 빨아두고 잠옷 대신 사찰복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머리는 별 수 없이 자연 건조. 온수기 용량이 넉넉지 않아 뜨거운 물을 너무 많이 쓰면 중간에 찬물로 바뀔 수도 있다고 해서 신경이 쓰였다. 자연 속에서 사는 건 여러 이점이 있지만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작년부터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 나로선 이런 불편함 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힘든 건 갑자기 치킨이 너무 먹고 싶다는 거였다… 너무 오랫동안 식욕이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사찰에 가니까 괜히 먹고 싶은 게 생긴다.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화장실 구석에는 거미가 살고 있었다.  엄지손톱만 하다. 나는 벌레를 무서워한다. 그래서 샤워하는 내내  녀석의 움직임을 주시했는데, 자꾸만  쪽으로 내려오려고 해서 난감했다. 집이었다면 휴지에 싸서 변기에 넣었겠지만 내가 있는 곳은 사찰이었다. 불교에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귀하게 생각한다. 절에는 대개 사물(四物)이라는 종이 있는데, ‘법고 가축이나 동물을 위해, ‘범종 지옥의 중생을 위해, ‘목어  속의 생명을 위해, ‘운판 하늘을 나는 생명을 위해 치는 것이란다. 그들이 구원받아 극락에 이르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팀장님께 이런 말을 듣고 나니 거미를 변기에 넣는 짓은 도무지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꾸 나에게 가까이 오는  무서워서 ‘ 어디까지 내려오니...!’ 하고 속삭였더니 다시  집으로 올라갔다. 사찰 거미는 사람 말을 알아듣는  분명하다.



샤워까지 마치고 이불속에 들어가 있으니 마음이 두부처럼 뽀얗고 매끈해진 느낌이었다. 불과 전날까지만 해도 스트레스 때문에 숨 쉬는 게 불편할 정도였는데, 이곳에서는 몇 시간 만에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편안해졌다. 누구나 심신이 지칠 때면 자신을 지켜주고 포용해줄 존재를 그린다. 그곳에서는 문 밖만 나서면 나를 안아줄 자연이 있었고, 어머니의 마음으로 중생을 품어준다는 아미타불도 계셨다. 그 사실만으로 위로가 됐다. 아무래도 내가 기댈 곳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평소엔 아무리 피곤해도 새벽 3-4시까지 오지 않던 잠이 이렇게 쉽게  줄이야. 새나라의 어린이 마냥 9시부터 졸았다. 한참 불면증으로 괴로울  어째서 어린아이와 강아지는 쉽게 잠에   있는지가 궁금했다. 생각해보니 하나같이 마음이 깨끗한 존재들이었다. 반야사에   7시간 밖에  됐지만 애쓰지 않아도 잠이   보면 나도 마음이  깨끗해졌던 모양이다. 부처님께서 얼룩진  마음을 살뜰히 빨아   드는 곳에 말려놓기라도 하신 건지. 일단 부처님의 빨래 실력을 믿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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