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바다를 보러 다녀왔어요. 옷을 세 겹이나 껴입고 뒤뚱대면서 말입니다. 바다를 보러 가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날씨가 따뜻했는데 그 날은 유독 추웠으니 날을 잘못 골랐지요.
차는 커녕 자전거도 없는 뚜벅이 신세라 아마 인생의 오분의 일 쯤은 대중교통에서 보낼 겁니다. 최근에는 지하철을 타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어요. 참 이상해요. 전에는 노력해도 잘 안 되던 일이었거든요. 하지만 더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생각이 차고 넘치니 오히려 아무런 생각을 안 하게 되던 걸요. 사람 마음은 요지경입니다.
생각이 넘칠 땐 흐리멍텅했던 기억도 또렷하게 되살아나지요. 전에 알던 사람이 해준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 사람은 비가 오는건 사실 바다가 내리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부터 제게 비 오는 날은 낭만이 있는 날이 되었어요. 우산 속에서 걸을 때면 바다 속을 휘젓고 다니는 몽롱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눈을 감고 있으면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지요. 요즘 같을 땐 비라도 시원하게 내렸으면 좋겠지만 비소식을 듣기가 어렵네요. 그래서 바다로 갔습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으면 기다리는 이가 가는 수밖에 없지요.
물결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모양을 물비늘이라고 한답니다. 바다는 얼마나 큰 물고기이기에 그렇게나 많은 비늘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날 본 바다의 물비늘은 유난히 눈이 부시고 뾰족했어요. 유연한 조각들이 춤을 추며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여럿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코 끝이 붉어질 때까지 지켜보았지요. 곧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어요. 나는 이미 너무 추웠지만 계속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조금 더 추위 속에 있고 싶었거든요. 나와 멀찍이 떨어져 버스를 기다리던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를 잡아 탔습니다. 버스는 그가 떠나길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제서야 얼굴을 들이밀었지요. 나는 덜컹이는 버스 안에서 '운명의 장난'이라는 클리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운명의 장난이 펼쳐지고 있을까요? 그것이 분하거나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그냥 모든 것이 장난이길 바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무엇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나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선 철퍼덕 넘어져 우는 소리를 하다가 얼굴을 가린 소매 뒤에서 키득키득 웃고 싶습니다. 컷! 소리 하나에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늘 봄과 가을을 두고 갈팡질팡 했답니다. 생각해보면 내게 적절한 온도를 찾느라 그랬던 것 같아요. 마음이 시려울 땐 따스한 봄이 그리웠고, 열감이 차있을 땐 가을을 기다렸으니까요. 지난 몇 달은 쉽게 쓸쓸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이다지도 봄이 기다려지나 봅니다.
마음의 온도를 잴 수 있을까요? 무럭무럭 김을 내며 익는 고구마에 젓가락을 찔러 넣듯 마음에도 온도계를 찔러 넣어볼 수 있다면. 제 마음의 온도는 늘 그랬던 것처럼 어중될 테죠.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성미라 전엔 그 미적지근함을 참기가 어려웠어요. 난 왜 늘 뜨겁거나 늘 차가운 사람일 수 없는지 궁금했습니다. 수많은 시간을 괴로워하고 나서야 그런 뚜렷한 온도를 가진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지요. 그래서 요즘은 애매한 것을 견디는 연습을 합니다. 답이 없는 것도 답이라는 것, 이도 저도 아닌 것 역시 무엇이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애를 쓰는 뭐 그런 것들 말입니다.
나는 여전히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젠 제법 가을의 정취에 젖어들 줄도 압니다. 어중간한 온도의 마음을 품고 전에는 걷지 않던 길을 걷습니다. 이젠 그 어떤 계절도 나를 심각하게 만들지 못하는 날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나는 괜찮습니다.
미안하지만 한동안 바다에게 가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