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읽고 싶거나 읽어야 하는 책의 리스트를 작성해두지만 막상 서점에 가면 즉흥적으로 책을 고르게 된다. 눈길을 사로잡는 책이 있으면 손이 가는대로 한 페이지를 펼쳐 그 부분을 읽는다. 그리고 마음에 들면 산다. 가끔은 같은 방법으로 책을 펼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단어로 하루를 점치기도 한다. 어차피 이런 식으로 책을 살 거면서 리스트는 뭐하러 쓰냐고 물어보신다면, 글쎄... 정리변태라서? 좌우간에 책 읽는 덴 아무 문제 없습니다요.
난 요즘 생각은 적게 하고 말은 많이 하며 지냈다. 전에는 말 많은 걸 고치려고 애를 썼는데 이젠 어느정도 자포자기 하게 됐다. 그냥 수다쟁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옆구리에 끼고 살련다. 어차피 말수를 줄인다고 해도 누군가는 날 재미 없다고 할 거다. 장단점이란 건 가끔 허탈할 정도로 주관적이다. 오늘 내가 책을 펼쳐 가장 먼저 발견한 단어는 ‘생각’. 수다쟁이로 남기로 결심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생각은 좀 하면서 살라는 뜻인 것 같다.
천하의 수다쟁이인 내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서점에 데려가는 것이다. 서점에 있으면 책이 내게 와글와글 떠드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가만히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해서 듣게 된다. 그래서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땐 로맨틱한 기분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이 인파 속에서 나를 단번에 찾아내는 것처럼, 와글거리는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단 한 권의 책이 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니까. 이번에 고른 책은 이기주 작가의 <글의 품격>이다. 아무래도 요즘 통 글다운 글도 못 쓰고, ‘내일 뭐 먹지?’ 같은 생각만 하며 지내는 내게 책이 경고를 보내는 것 같다. 묵직하면서도 로맨틱한 목소리로 ‘언제까지 남의 글만 써주고 있을래?’ 하면서.
전에 알던 사람이 자기는 무릎을 탁! 칠 만한 좋은 생각이 떠올라도 굳이 기록하지 않는다고 했다. 생각이 자기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면 그때서야 그걸 써먹는다고. 그러다가 그 좋은 아이디어를 영영 잊어버리면 어쩌냐고 했더니 그러면 그 생각과 인연이 아닌 거랬다. (이렇게 쿨할 수가...) 이처럼 저마다 인연을 솎아내는 방식은 다른데, 이런 것에서 그 사람의 고유한 무언가가 드러나는 것 같다. 기껏 만들어놓은 독서 리스트는 팽개치고 미신스러운(?) 방식으로 책을 고르는 나는 계획하는 걸 좋아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감을 더욱 따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난 내 방식이 좀 비효율적이긴 해도 즐거움을 느끼는 데는 더없이 좋다고 생각한다. 베스트셀러나 전문가들이 권장하는 필독서 목록에 있는 책을 사들고 올 때도 있지만, 왠지 그 책엔 정이 안 간다. 내 돈 주고 샀는데도 내 책이 아닌 것만 같다.
무작위로 펼친 페이지에서 잠자던 단어 혹은 문장이 마음을 훅 치고 들어오는 경험은 아주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누군가는 나보다 더 재미있는 방법으로 책을 고르고 있을 텐데... 언젠가 내가 책 고르는 방법을 주제로 서로 자랑하는 시간을 가져도 꿀잼일 것 같다. 나 혼자 재밌는 건 같이 하면 더 재미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