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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Jan 18. 2020

신성하지도 로맨틱하지도 않은 죽음

얼마 전 다녀온 템플스테이에서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사찰에 가기 전 어떤 남자 한 명이 있었는데 유난히 눈이 슬퍼 보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남자에게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오래 만나온 연인과 결별하게 되었는데 얼마 후 여자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충격이 컸는지 남자는 하는 일도 잠시 접어두고 전국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사연은 나에겐 ‘드라마 같은 이야기였지만 당사자에겐 현실이다. 온갖 비극을 겪는 드라마 주인공들이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이유는 그것이 ‘드라마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일을 겪으면 제정신으로  수도 없고 평온하게 죽을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혹은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은 더욱 잔인한  같다. 사랑의 대상은 사라지고 마음만 덩그러니 남겨지기 때문이다.


남자의 사연을 들은 뒤로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죽음은 어떤 존재의 생명력이 사라지는 것만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다. 형태가 없는 것이라도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그것도 죽음이다. 전에 믿던 것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면 그것은 믿음의 죽음이고, 품고 있던 추억이 잊히면 그것은 추억의 죽음이다.


새해가 되면서  안에 있는 많은 것들이 죽었다. 죽은 것들이 있었던 자리에는 새로운 것들이 채워졌다. 그런데 죽은 것들이 뭉개고 짓누른 흔적은 그대로 남았는지 마음의 모양이  울퉁불퉁해졌다.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 나오는 하밀 할아버지의 말처럼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한동안 어리둥절한 상태 된다. 내가 ()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내게 있던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왔고,  사라지게 되었는지 도통 알지 못할뿐더러,  모든 과정에서 내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느낀다. 가끔 이렇게 삶이 흘러가는 방식에 압도당할 때가 있다. 나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긴 하지만,  연인을 떠나보낸 남자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감히 추측해본다.


지인 중 한 분은 아버지께서 죽음에 가까워져 호스피스에 계신다. 그는 인생의 잔인한 점으로 ’그럼에도 매일이 이전과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간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소중한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감동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죽음이 신성하길 기대했던 나는 참 순진했구나. 대부분의 생이 그렇게 끝나버리는 것인가 보다.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계기를 통하여. 혹은 생일날 미역국을 먹듯 너무나 익숙한 흐름으로.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다가올 누군가의 죽음을 어떤 자세로 소화시켜야 하는 것일까. 나의 죽음은.


그저 ‘담백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 추상적인 단어만 떠오르는 걸 보니 죽음에 대해 논하기에 난 아직 너무 어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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