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소개팅을 시도했다.
아, 소개팅이라 쓰고 인맥 넓히기라 읽기로 한다.
시도라고 한 이유는 시도로 끝났기 때문이다.
한두 달 전부터 계속 날 괴롭혀온 친구가 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연락해서 소개팅 얘기를 했다.
처음엔 상대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왜 나에게 소개해주고 싶은지를
줄줄 읊으며 열심히 설득하다가
내가 넘어오지 않자 인맥이라도 넓히라며
병원 가기 싫은 애 달래듯 구슬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귀찮았다.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해
글을 쓰고 싶은 만큼 쓰다가
명상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홀리한 요즘의 일상이 만족스럽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도 먼저 연락이 오지 않으면
굳이 만나지 않는 자발적 고독(?)의 시기라
소개팅은 내게 잉여 그 자체였다.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 자꾸 꼬시는 게 수상해서
“솔직히 말해. 폭탄 제거반이 필요한 거냐?”
라고 대놓고 물었더니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오리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 너 웃을 일 좀 생기라고.”
친구야. 미안하지만 이제 그런 건 날 웃게 할 수 없어.
나를 웃게 하는 건 개와 편지와 트랜스젠더 강학두란다.
이 사실을 친구가 모르는 걸 보니
서로 깊은 이야기를 한지 꽤 오래되었구나 싶었다.
내가 요즘 잘 안 웃냐고 물었더니
그렇진 않지만 평온하게 썩은 웃음을 짓는다고 했다.
평온하게 썩은 웃음이 대체 뭐람. 멕이는 건가?
매일매일이 똑같고 고요하며
누굴 만나지 않는 이상 특별한 자극도 없어서
웃어봐야 미소 짓는 게 전부긴 하지만
나름대로 진심이 담긴 웃음인데 참 너무하다.
아무튼 날 평온하고 썩은 웃음에서 구제하려는
친구의 노력과 마음이 너무 갸륵해서
일단 하겠다고는 했다.
그런데 도무지 의욕이 생기지 않아서
나는 그냥 인맥 넓히기를 ‘시도’하는 것이고
그래서 상대의 사진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으며
사전에 메시지도 주고받지 않겠다.
최선의 예의는 차리겠지만 파탄이 나도
나를 너무 미워하지는 말라.
고 친구에게 으름장을 놨다.
다행스러워하는 친구 표정을 보니
내가 폭탄 제거반인 게 분명한 것 같았다.
약속 시간에 맞춰서 나갔는데
남자분이 조금 일찍 도착해 서점에 있겠다며
서점에서 파란색 스트라이프 셔츠에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를 찾으면 된다고 했다.
서점에 들어가니 동일한 인상착의를 한 남자가
공무원 시험 문제집 코너 앞에 있었다.
그에겐 너무나 미안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와의 인연은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난 공시에 대해 관심도 지식도 없고
공무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말에
그랬으면 벌써 자살했을 거라고 수십 번 얘기한
편견 덩어리 인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공시와는 상관없이 참 좋은 분이셨다.
친구에게 나에 대한 사전 정보를 들었냐고 했더니
그래서 더 마음 편하게 왔다며 고마워하셨다. (읭..)
식사는 조금 부담스러운데 티타임은 어떠세요, 했더니
그럴 수 있다면서 흔쾌히 배려해주신 점도 감사했다.
직장을 다니며 공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고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게 두렵긴 하지만
평생의 꿈이어서 포기하는 게 더 두렵다고 했다.
패기가 있는 사람이다. 나와는 결이 다르다는 생각.
그는 나에게 결혼관과 이상형에 대해 물었고
사는 곳과 하는 일에 대해 물었고
자신이 뚜벅이인 것에 대해서 무안해했다.
나는 말이 참 많은 편인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나는 결혼관과 이상형보다는
‘지금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하여,
사는 곳과 하는 일보다는
무엇을 즐기고 사랑하는지에 대하여 물어주길 바랐고
자차 유무로 자신의 가치와 함께
나의 가치도 결정짓지 않는 사람이길 바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감사함과 무기력함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물과 기름처럼 뒤섞였다.
내가 누군가에게 계속 재잘댈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이 나의 진짜 모습을 알아주고 있다는 뜻이며
그러므로 상대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론 깊은 무기력함과 피곤이 느껴져서
헤어지기 직전 내 연락처를 물어
사려 깊은 메시지를 보내준 상대에게
답장도 하지 못하고 계속 졸기만 했다.
나는 내 생각보다 더 이기적인 사람인가 보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을 땐
사람이고 일이고 모두 귀찮아졌다.
대2병이 도진 것 같았다.
친구에게 카톡으로 ‘잘 안 됐어. 미안해.’ 했더니
‘괜찮아. 걔가 맛있는 거 사줬지?!’ 한다.
안타깝지만 더치페이했어...
남자분에게 욕먹을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괜찮다는 이 친구,
나를 많이 아끼는구나.
이렇게 제멋대로인 나를
사람들은 왜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걸까?
마음에 솜사탕 같은 무언가가 가득 부풀어 올라서
한없이 포근해졌다. 이대로 좋아졌다.
나를 웃게 하려고 소개팅을 권유한 친구나
무례하게 느껴졌을 나를 배려해주신 남자분이나
말 많은 나를 진득하게 참아준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
소개팅은 인맥 넓히기로, 그것도 ‘시도’로 끝났지만
이미 있는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낀 걸 보면
마냥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앞으론 친구 때문에 소개팅을 하지는 않을 거다.
너무 착하게 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사랑하는 이들에겐 한없이 착하고 싶은 밤.
내일은 좀 덜 평온하게 썩은 웃음을 지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