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울 땐 호기롭게 괴로워하기
얼마 전 봄을 맞아 동네에 가지치기가 한창이었다. 나무는 때를 알고 있었다는 듯 날카로운 전기톱에도 순종적이었으나, 그걸 보는 나는 팔이 잘리는 것처럼 끔찍했다. 나무의 시선은 방황하는 듯했고 새들은 거처를 빼앗긴 부랑자처럼 측은해 보였다. 그러나 곧 완연한 봄이 되면서 나무에는 수많은 잔가지와 새순이 솟아났다. 새들은 거처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지저귀고 먹고 날아다녔다. 섭리였다.
가지치기 장면을 보며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듯 아팠던 일을 떠올렸다. 고난은 경험이 많다고 면역이 생기지는 않는 것 같다. 괴로움이 짙어지면 죽는 게 속 편하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종이에 베인 손가락에 반창고를 붙이는 건 무엇을 말해주는가? 고난은 우리의 부와 명예를 빼앗아갈 수는 있어도 생명력까지 빼앗지는 못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만 번 되뇔 때조차 본연의 ‘나’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기억한다. 이는 나무가 인부의 고생이 무색할 만큼 금세 초록빛 새순을 뿜어낸 것처럼 신성한 일이다. 우리는 조금 더 우리의 생명력을 신뢰할 필요가 있다. 아무런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결국 살아낼 것임을 믿는 것이다.
마음의 바다가 요동칠 때 파도에만 몰두하면 작은 파도도 쓰나미처럼 커 보인다. 내가 파도보다, 아픔보다 언제나 크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파도가 치도록 내버려 둘 넉넉함이 생긴다. 이것은 ‘내가 이 아픔을 반드시 이겨내 주리라’는 의지의 표명으로 그치지 않는다. 섭리, 즉 잎사귀와 열매를 풍성하게 맺다가도 낙엽을 떨어트리고 추위에 떨기도 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 음만으로 이루어진 음악이 아름다울 수 없듯 삶은 요동치는 과정을 통해 예술이 된다. 고난 속에 거할 때, 동시에 그 어떤 것도 침해할 수 없는 신성한 생명력이 나를 이끌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때 인생은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