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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May 30. 2018

누가 우리 엄마를 공장으로 보냈나


    우리 엄마, 순이씨는 이른 나이에 공부를 포기당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우리 외할머니를 먼저 소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외할머니는 아들 1명을 위해 4명의 딸을 낳으신 전형적인 '옛날 분'이다. 할머니는 나의 외할아버지인 당신의 남편을 젊은 나이에 하늘로 보내셨다.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고, 당시 대부분의 여성이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 역시 교육의 기회를 일찍 박탈 당하셨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일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자녀 양육을 위해 갖은 고생을 감내하셔야 했던 할머니는 허리가 굽어서도 한시를 가만히 있지 못하신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니 엄마 역시 공부를 오래 하기는 어려웠다. 할머니는 어려운 집안 살림에 맏딸인 엄마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갓 국민학교를 졸업한 엄마에게 '공장에서 일을 하면 여름방학이 끝나고 중학교에 보내주겠다'고 하셨단다. 어린 순이는 어머니의 말만 믿고 '중학생의 순이'를 꿈꾸며 밤낮없이 재봉틀을 돌렸으나, 몇 해가 지나도록 할머니는 순이씨를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때를 떠올리며 엄마는 아직도 공장으로 가는 길에 휘몰아치던 칼같은 겨울 바람을 기억한다고 했다. 가난은 무심하게도 추운 겨울날 걸어서 출퇴근 하는 어린 순이에게 두꺼운 점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는 짧은 가방끈을 움켜쥐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누군가는 순이씨가 노오력이 부족했던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돈이 없어 전기가 끊긴 방에서 촛불을 켜놓고 공부하는 청년, 몸이 편찮으신 홀어머니를 도와 장사를 하며 틈틈이 자습서를 읽는 소녀는 안방극장의 단골 캐릭터다. 이런 불굴의 캐릭터들은 우리로 하여금 노오력! 하면 장시간 노동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드라마일 뿐, 현실과는 다르다. (그런 피나는 과정을 거쳐 성공하신 분들은 정말 정말 대단한거다. 상이라도 줘야한다. 예를 들면 강철체력상...)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다는 캔디형 주인공도 사실 이젠 한물 갔다.



   편 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난 엄마의 학력이 낮은 게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업과 주중 알바를 병행해 본 학생이라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해할 것이다. 당시 엄마의 노동시간은 풀타임 파트타이머 수준이었고 집에 오면 집안일도 도와야 했으니 공부보다는 잠이 급했을 것이다. 더구나 맏이라는 이유로 밤낮 없이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사람을 얼마나 무기력하게 했을까? 그렇다고 학교에 보내달라고 조르기에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다. 결국 엄마는 몇년 간 참고 참다가 또래들이 똑단발에 교복을 입을 때가 되어서야 할머니 품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것이 엄마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사실은 나를 한동안 슬픔에 잠기게 했다.


    그렇다면 엄마를 학교에 보내주지 않은 할머니의 잘못인가? 그것 또한 아니다. 만약 싱글맘이 충분히 자립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누구에게나 교육받을 권리가 있음이 인정되는 세상이었다면 할머니의 선택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변명 같을 수도 있지만 나는 결국 엄마도 할머니도 미성숙한 시스템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할머니는 '내가 너희 엄마를 학교에 보냈어야 하는데 그때는 그런 걸 몰랐다.'며 미안해 하셨다. 할머니는 이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40여 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동안 그 누구도 할머니에게 '여성도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제대로 교육 받지도, 풍족한 형편에서 자라오지도 못한 이 두 여성은 가장이자 어머니로서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온 힘을 다해 살아왔다. 나는 이들에게 감히 노력을 하지 않았기에 학력이 낮은 거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나는 한 번도 이들만큼 절박하게 삶에 매달려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건 이 두 여성의 희생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할머니는 아직도 전단지에 쓰인 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신다. 엄마는 종종 어려운 단어나 알파벳을 헷갈린다. 그러나 할머니는 어버이날 손편지를 읽기 위해 초등학생 손녀에게 모르는 단어의 뜻을 물으신다. 엄마는 나와 대화를 나누며 이해되지 않았던 단어들의 의미를 알아내 배우려고 한다. 또한 알파벳은 자주 가르쳐 주었더니 이제 거의 헷갈리지 않는다. 나는 너무 늦기 전에 엄마가 학교에 다시 갈 수 있게 해주고 싶다.


    할머니와 엄마가 충분한 교육 기회를 누리지 못한 것이 아직은 조금 분하다. 그러나 때론 내가 그들을 존경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한 것 같다. 단순히 훌륭한 어머니들이기에 존경하는 것이 아니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이들과의 소통을 위해 그것을 채워나가려고 노력하는 여성이어서 그렇다. 그래서 나에겐 그들이 생애 가장 대단한 여성들이다. 부디 할머니와 엄마가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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