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아파트 뒷편의 화단은 따뜻한 계절이 되면 총천연색의 꽃과 풀들로 가득 메워진다. 이맘때 화단은 동네 명소가 되어 바삐 움직이던 사람도 잠시 이곳에서 꽃향기를 즐기고 간다. 화단을 보기 위해 멀리까지 산책을 나오시는 할머니들도 계신다.
처음부터 그 화단이 그렇게 매혹적인 곳은 아니었다. 길고양이들이 쥐를 쫓고,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쓰레기를 던지던 곳이었다. 이 화단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어느 아주머니께서 화단을 가꾸기 시작하고 나서부터다.
꽃으로 가득찬 화단을 본 게 벌써 두 번째니, 아마 2년 전일 거다. 봄이었다. 평소처럼 길을 나섰는데 뭔가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화단에 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엄마에게 ‘집 앞 화단을 누군지 몰라도 가꾸고 있어.’ 하고 소식을 전했다. 엄만 ‘저 앞에서 떡 파는 여자가 한다더라’고 대답했다. 역시 아줌마들 사이의 입소문이란.
그 이후로 길을 지나거나 강아지 산책을 갈 때마다 화단은 엄마와 나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떡집 아주머니와 그 아들이 묵묵히 잡초를 솎아내고 꽃을 심는 장면도 자주 보였다. 아무튼 내겐 잘 된 일이었다. 화단이 아름다워진 뒤로 사람들이 더이상 쓰레기도 버리지 않았다. 덕분에 산책이 즐거워졌다.
특별한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굳이 어떤 일을 도맡아 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 엄마 역시 몇 년 전부터 집에서 화분을 가꾸곤 했다. 내가 실수로 가지를 부러뜨리면 도끼눈을 하고 쏘아볼 정도로 애지중지 했다. 화분을 가꾸는 건 돈과 시간이 드는 일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창가에서 불어오는 향기가 좋다며 라일락을 키웠고, 죽어가는 수국을 정성으로 돌보며 살려냈다. 행운목에 꽃이 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며 꽃이 필 날만 기다렸다.
아무리 잘 맞는 사람들을 만나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공간은 분명히 있다. 엄만 식물을 통해 그곳을 채우려 했다. 어쩌면 그게 자기 자신을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겉모습을 치장하려는 것이나 정성을 쏟을 소일거리를 찾으려는 것은 어쩌면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 아닐까? 아름다운 화단에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삶에 정성을 들이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