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먼 집'(2016), 이소현 감독
Synopsis
아흔 셋,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가 자살을 시도했다.
취업준비를 하며 보내던 어느 날,
나의 가족이자 오랜 친구인 할머니가 먼 곳으로 떠나려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아직 나는 할머니를 보낼 수 없어 곁에서 지키기로 했다.
"할머니 죽으믄 나도 못 본디 괜찮애?"
무서우면 할머니를 가장 먼저 찾던 아이,
할머니가 해주는 옛날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던 아이,
이제 훌쩍 자란 나는 어느새 작아진 할머니를 기억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할머니, 내가 영화 열심히 찍을 테니까 다 보고 돌아가셔. 그 전에 돌아가시면 안돼”
최근 취업 준비와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그러다가 오래전 보았던 이 영화가 생각이 났다. 늘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고 쓰고 싶었다. 나는 정말 천하의 게으름뱅이라서, 미뤄왔던 글을 쓰는 데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강려크한.... 아무래도 할머니가 많이 보고싶은 것 같다. 영화의 감독처럼 나도 할머니 손에 자라서인지 할머니에게는 특별히 애틋한 마음이 든다. 회사는 차고 넘쳐도 내가 일할 수 있는 회사는 없는 것 같은 요즘, 나를 무조건적으로 받아주는 할머니의 푸근함이 그립다.
'할머니의 먼 집'은 자살을 시도한 할머니와, 할머니를 기억하려는 손녀(감독)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단순히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기보다는 나의, 세상의 모든 이들의 조부모님들의 삶을 떠올렸다. 감독이 의도한 주제는 아니지만, 나는 영화 속에서 100세를 바라보는 할머니가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 '그 무언가'를 보았다.
사실, 영화의 시놉시스는 노인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만으로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자살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들 중에 '노인'을 주제로 하는 것은 내게 없었다. 모두가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고 있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노인은 죽음과 가장 가깝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남은 삶을 살아낼 자신이 없기 때문에 선택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노인'과 '자살'은 연결하기 힘든 것들이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노년기는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흘러간다. 굳이 고통스럽게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더라도 죽음은 가까운 시일 내에 찾아올 것이다. 이를 매일 실감하며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여생이 두려워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할머니께 찍어도 되느냐고 물으면 “워따 뭐 이런 송장 같은 할매를 찍냐. 이쁜 너나 찍으라.” 라 말씀하셨지만 정작 카메라를 들이대면 할머니는 예쁜 모시옷으로 갈아입고 “할머니 저그 산책 갈랑께, 산책하는 거 찍어라.” 라 말씀하시며 좋아하셨다.
이렇게 밝은 할머니가 왜 죽으려고 했는지 궁금했지만 나는 선뜻 묻지 못했다.
문득 할머니를 스틸 사진이 아닌 영상으로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일상을 단편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할머니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드리고 싶단 생각에서였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박수를 받으면 할머니는 더는 ‘죽어야 쓴디’라는 말을 하지 않으시지 않을까?
글을 쓰기 위해 이런 저런 자료들을 찾아보며 자살과 노인 사이에 연관성이 낮다는 생각이 참 바보같다고 느꼈다. 한국은 노인들이 살아가기에 녹록지 않은 곳인 것 같다. 2011년 기준 OECD 통계에 의하면, 65세 이상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비율로 한국이 1위를 차지했다. 또한 보건복지부가 2014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65세 이상의 노인이 자살을 생각하는 원인에는 경제적 어려움(40.4%), 건강(24.4%), 외로움(13.3%) 등이 있었다. (노년층의 빈곤률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얼마나 심각한지 다들 아실 거라고 믿는다.)
삶의 무게는 나이를 불문한다. 죽음을 벗삼는 늙은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삶의 무게는 죽음과 조우하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세월은 삶의 무게를 줄여주지는 않는다. 그저 우리가 삶의 무게를 견디는 요령을 알게 할 뿐이다. 그러나 무게를 감당할 여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쉽게 감당하는 짐도 온 몸을 짓누르는 듯 느껴지는 법이다. 노인은 생활이 궁핍해도 근로능력을 상실한 상태이므로 이를 헤쳐나갈 방법이 없다. 최소한의 생계가 보장되지 않으면 여생이 아무리 순식간이라 하더라도 견딜 수 없어진다. 가족, 친지, 동년배 등 교류할 사람이 없으면 비참함은 더욱 증폭된다. 늙는 것도 서러운데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왜 통용되겠는가. 그만큼 한국 노인들의 삶의 질이 낮다는 뜻이다. 이것은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문제보다 더욱 시급하다. 삶이 있기 전에 그것의 무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느 손녀들처럼 '할머니 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돼.'라고 말했더니, 할머니는 '아이구 됐다. 그저 우리 손주들, 자식들이나 건강하면 되지. 나는 이제 만사 귀찮고 힘들다.' 하셨다. 평생을 고생만 하며 지내오셨으니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우리 할머니를 비롯한 많은 노인들이 이렇듯 무기력한 방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착잡했다. '이제는 그만 고생하고 싶다.'가 아니라, '완벽하진 않았지만 멋진 삶이었다.'라고 생각하며 생을 마무리할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 할머니는 자식들이 모두 장성하여 더이상의 경제활동이 필요없을 때에도 폐지를 주우러 다니셨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왜 괜한 고생을 하냐'고 화를 냈다. 나는 그 모습을 그저 지켜봤다. 나는 할머니가 왜 폐지를 주우러 다니시는지도, 엄마가 왜 화를 내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고, 엄마에겐 할머니의 행동이 도리어 마음의 짐이 되었던 것이다. 할머니께서 왜 '만사 귀찮고 힘들다.'고 하셨는지 알 것 같다. 그동안 할머니는 스스로 짐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셨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내가 엄마가 했던 걱정을 할까 두려웠고, 또 할머니가 느꼈을 두려움을 나도 느끼게 될까봐 두려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생각해봐도, 내 짧은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우리에겐 굽은 등으로 폐지를 주우러 다니며 허기진 배를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로 채우는 노인들의 모습이 너무나 익숙하다. 우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홀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정겹다'고 생각한다. 늙고 병든 부모를 누가, 어디서, 얼마의 돈을 들여 모실 것인지를 두고 우리는 피 터지게 싸운다. 내 어머니, 아버지가 어떻게 그들의 죽음을 준비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상황들을 왜 아무도(심지어 나조차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가난과 외로움, 노후와 죽음에 대한 선택권 박탈의 장면들을 나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오래된 삶이라고 해서 낡은 삶은 아니다. 낡은 것은 힘이 없으나, 쓸모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그런 존재인 듯 살아간다. 노인들의 현재와 미래는 그들이 선택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동안 궁금하지 않았던 것들이 궁금해진다. 아니, 이제는 궁금해 할 때도 됐다.
할머니에게 전화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