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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Nov 17. 2019

나의 연대기에는 어떤 제목이 붙여질까?

옆집 아줌마의 죽음을 추모하며

대학 동기들을 만나 술을 한 잔 걸쳤다. 알쓰인 나는 그 유명한 잘 취하는 여자.(자취는 안 한다) 취하면 무조건 어렸을 때 생각이 난다. 난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할머니 댁에서 살았는데, 학교를 멀리 다녀서 맨날 혼자였다. 한참 친구 좋고 노는 것 좋을 나이인데 동네 친구가 없으니까 그렇게 심심하더라. 그래서 맨날 옆집 아줌마랑 그 집 까만 푸들이랑 놀았다. 눈도 코도 털도 다 까매서 이름도 깜순이. 생각해보니까 아줌마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냥 ‘OO 엄마’라고 불렸다.


아줌마는 나를 엄청 예뻐해 줬다. 가끔은 우리 엄마보다 더 날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만 보면 숨이 막히도록 껴안고 뽀뽀를 잔뜩 해줬다. 아줌마한테는 늘 술 냄새가 났다. 그 집 아저씨가 아줌마를 맨날 때려서 아줌마는 속상함을 술로 풀었다. 아줌마는 가끔 깜순이에게 화풀이를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깜순이 때리지 마세요’하면서 아기처럼 품에 숨기고 도망쳤다. 그게 반복되자 깜순이는 나만 보면 구원자라도 나타난 듯 달려와 안겼다. 하지만 아줌마는 아무도 숨겨주지 않아서 늘 상처투성이였다. 아들이 있긴 했는데 그 오빠는 아줌마한테 늘 매정하게 굴었다. 아줌마는 늘 자기 이름 대신 아들의 이름을 빌려 ‘OO 엄마’로 불렸지만, 아들은 좀처럼 자기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OO 엄마’라는 말만 무안해서 늘 허공을 동동 떠다녔다.


아줌마는 술에 잔뜩 취한 채 나를 쓰다듬어주면서 ‘착하고 예쁘게 커야 한다. 엄마랑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같은 덕담으로 위장한 주사를 부렸다. 나한테 아줌마처럼 살갑게 말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게 싫지 않았다. 가끔은 날 껴안고 미안하다며 울었다. 난 도대체 뭐가 미안한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줌마는 그냥 자기 자신한테 미안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줌마는 내 기억 속에서 흐려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할머니가 ‘OO 엄마가 술에 취해서 집 뒤에 흐르는 개천에 빠져 죽었다더라’고 했다. 깊어봐야 발목 조금 위까지 올라오는 얕은 개천. 할머니가 ‘똥물’이라고 부르던 개천이다. 거기서 아줌마는 허무하게 죽었다. 수십 년 동안 매를 맞으며 살다가 똥물에 빠져서 바보 같이 죽은 거다.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지 몰라서 세상 모든 것에 신경질이 났다.


다들 죽음과 같은 뒤숭숭한 이야기 앞에선 입을 다물지만 나는 아줌마 이야기를 곧잘 한다. 아줌마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다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으면 아줌마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영영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거라던데, 나는 아줌마 이름 석자를 몰라서 이렇게 긴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아줌마를 기억하는 것이 그리움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같다.


우린 모두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어가고 있다. 나도 언젠가는 생명을 다하고 아줌마 곁으로 가게 될 것이다. 죽음은 한 사람의 연대기가 마무리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고 쓰일 것만 같았던 주인공의 역사는 사망이라는 단어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연대기의 제목은 그와 함께한 이들이 붙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목은 매우 주관적이면서도 여러 개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은 세상의 공평함과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 잘난 삶이든 못난 삶이든 결국은 끝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 삶을 포장했던 것들은 힘없이 허물어지고 날 것 그대로 세상과 사람들 앞에 놓인다. 어떤 죽음이든 애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함은 당연하지만, 어떻게 기억되고 회자될지는 그 사람이 남긴 것에 달려있다. 지금도 연대기는 쓰이고 있지만 당장 오늘을 끝으로 마무리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연대기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고민하기 위한 ‘적당한 시기’는 없다. 매일, 모든 순간이 적당하다. 나의 연대기에는 어떤 제목이 붙여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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