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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름모 Dec 26. 2020

스물둘을 마무리하며( 1 )

어땠냐면

구글에 '회고'라고 검색하면 2020년 회고, 와 같은 제목을 가진 글들이 주욱 떨어진다.


매년 나름의 회고를 하는 편이지만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언제나 드는 생각은 비슷하다.

요컨대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즐거웠고, 뜨겁다가도 차가웠으며 이러한 감정들을 깨닫고 붕 떴다가도 추락했던 날들을 살아냈다는 것.


작년 10월에 이사를 했다. 내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 전셋집을 구했다. 집은 좁아졌고 사람은 한 명 더 생겼다. 조금은 꽉 차고 복잡해진 집에서 누워있으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생각이 많아지곤 했다.


올해 초에는 회사의 신규 서비스 출시를 위해 팀원들과 밤낮을 샜다. 4월까지 주말에 쉬었던 날을 손에 꼽기 힘들었던 것 같은데, 아닐 수도 있다. 기억은 언제나 내 중심으로 다시 짜이곤 하니까.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채로 노를 저었다. 너무나도 오래된 여정에, 그 누구도 방향을 바로잡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일단 정박하고, 일단 쉬고, 일단 출시하자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 뭐가 어떻게 되었든 우리 서비스는 출시되었고, 나는 쓸데없이 오너쉽 가지는 데에 재능이 있어 내 새끼를 키우는 마음으로 회사의 서비스를 키우며 일 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팀원이 입사했다. 2명이 된 우리 팀은, 드디어 '팀'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일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그분께는 참 배울 게 많았다. 교육에 대해, 삶에 대해, 생각에 대해서도 그랬다. 동시에 내 안에 숨어있는 작은 열등감과 자존심 같은 것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9월 즈음 또 다른 팀원이 입사했다. 나는 팀장이었고, 어떤 것부터 먼저 해야 할지 어지러웠다. 문제를 직면하기 싫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각각 11살, 7살 차이가 나는 팀원들과는 매일매일이 의견 대립의 연속이었다. 여태 팀 내 의견을 조율하여 의사결정을 했다고 얘기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냥 포기의 연속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나보다 적어도 7년을 더 살았고, 더 많은 경험을 했으니 당연히 그들이 맞다. 아니 맞을까? 아닐까? 확신이 없으니 판단이 모호해지고 결국 책임을 덜기 위한 포기를 해버린 건 아니었나. 모르겠다. 돌아보니 그렇다.

파트장님은 나에게 휘둘리지 말라고 했다. 주관을 가지고 판단하라고 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던 때, 많이 아팠다. 응급실에 갔는데 편두통이라고 해서, 약을 받아먹었다. 집에 와서 점심으로 먹은 죽을 다 게워내고 포카리스웨트만 겨우 넘겼다. 나아지지 않아 동네 내과에 갔으나 코로나 증상이 있으면 진료가 안된다고 해서 퇴짜를 맞았다. 두통을 겨우 참고 2차 병원에 갔는데, CT까지 찍었음에도 편두통이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하루하루 연차를 냈다. 양약이 안 들어 한의원에 갔다. 침을 맞는데 선생님께서 허리의 대상포진을 발견하셨다. 그냥 두드러기라고 생각했는데 대상포진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어 피부과에 갔다. 온몸을 질질 끌며 거리를 걷는 데 정말 건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피부과에서는 대상포진이 맞다고 했다. 약을 받아와서 한 숨 돌렸다. 이제 낫겠지. 대상포진 약을 꼬박꼬박 먹었다. 플라세보 효과인지, 점차 나아지는 기분에 뮤지컬 수업도 다녀왔다. 아픈 몸을 이끌고 나댔던 나에게 보복이라도 하는 듯 구토감과 심한 두통은 집으로 돌아와 변기통을 부여잡게 했다. 다음날 대상포진 진료에 유명한 대학 병원에 갔다. 피부과에 가서 보여달라는 피부를 대충 보여주고, 두통과 구토감 때문에 일상생활이 어렵다고 말씀드렸다. 대상포진은 거의 다 나은 상태라고 말씀해주시며 신경과에 가보라고 하셨다. 겨우 신경과 접수처에 가니 점심시간이라서 진료가 어렵다고 하셨다. 병원 화장실에 누워서 나오지도 않는 구토를 했다. 코로나 문진 스티커가 화장실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던 게 기억난다. 겨우 신경과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내가 뇌수막염인 것 같다고 하셨다. 대상포진 균이 척추를 타고 뇌염이 된 것 같으니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고 입원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너무 아파서 당장 죽고 싶었으나, 드디어 제대로 된 병명이 나온 것 같아 안도했다. 뭔지 알아냈으니 이제 치료할 수 있으니까. 응급실로 이동해서 누워있으니 계속 진통제를 놔주셨다. 살 것 같았다. 앞으로 계속 이 진통제를 달고 살고 싶었다.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응급실로 동생을 불렀다. 의료진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계속 전화를 받았다. 응급실에는 코로나 때문에 병상이 부족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미안함과 씁쓸함이 뒤섞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응급병동으로 입원했다. 6인실에서, 다른 환자들이 가족들과 있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가끔 간호사 선생님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 코로나로 인해 병문안은 금지였지만, 친구들은 이렇게 저렇게 잘 와서 내 머리를 감겨주거나 간식들을 주고 갔다. 회사 대표님이 오셔서 위로금과 음료를 주고 가시기도 했다. 영화도 보고 책도 읽으며 일주일 입원을 마치고 잘 퇴원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는지 퇴원하자마자 보험 서류 처리하고 안경점과 미용실도 다녀왔다. 

노인들이 자주 걸리는 대상포진과 뇌수막염을 누가 22살에 걸리냐며 의사 선생님께 많이 혼났다.

다신 아프고 싶지 않다.

이때 연차를 14개나 사용해서 12월에 휴가를 못 쓰고 있는 게 억울하기도 하고,

내가 나를 얼마나 챙기지 않았는지 직면할 수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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