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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름모 Mar 20. 2022

잘 가, 스물셋(2)

돌아오지 않을 셋을 보내며

6월에는 3주 정도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 하시기도 했고 어차피 백수라서 할 것도 없었다. 집에 내려가 있는 동안 구직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서 매일 밤 구직 사이트에 접속했던 것 같다. 나는 종종 조급해하는 내가 맘에 들지 않아서 노트북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5월에 일을 그만두고 쉰 지 1달이 넘었을 때, 엄마는 이제 슬슬 일을 구하라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하고 4년을 쉬지 않고 내달린 나에게 조금은 모진 처사라고 생각했다.

한 달 이상 쉬면 심심하지 않아? 엄마의 말에 난 조용히 '맞아'라고 대답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빗줄기가 거세져 흔들리는 창문처럼 그랬다.

생각해보면 항상. 합리화. 항상 엄마는 합리화를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도, 엄마는 실업계 고등학교가 인문계보다 더 좋다고 했다. 빨갛게 드러난 표면이 다 보이는데도, 현실적인 이유가 있음에도 항상 마음이 가는 대로 결정하는 척하는 거. 가장 덜 나 빠보이게 의견을 주입하는 방법. 엄마가 밉진 않지만 이건 별로인 것 같아.


어느 날 아빠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아빠를 생각하면 당혹스러웠지만 k장녀의 본능인지 당장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일이 먼저였던 것 같다. 지금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날부터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놀란 엄마 옆에서 조용히 다시 일할 수 있는 회사를 찾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까운 과거를 수습하고 가까운 미래에 대비하며 살다 보니 7월이 왔다.


7월에는 L과 등산을 했던 것 같다. 여러 번 토할 것 같았는데 L이 잘 붙잡아줬다. 전날 밤 싸우고 만나서 조금 어색했지만 L이 먼저 손을 잡아줘서 고마웠다. 인왕산은 정말 예뻤고 우리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지만 등산을 마친 후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얌전히 집으로 돌아왔다. 들에 핀 꽃들과 연리지를 함께 보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을 하며 계속 계속 걸었다. 다시 생각해도, 그때 나와 함께해줬던 L에게 너무 감사하다. 이렇게 곱씹을수록 좋은 기억은 생각보다 만들어지기 어렵고 그만큼 소중하다. 그리고 7월 중순, L은 국방의 의무를 위해 떠났다. 입대 전날 밤, L의 집 앞 가로등 아래에서 평생 뽑을 눈물을 모두 뽑았다. 택시를 태워주며 택시 안에서 사연 있는 여자처럼 울지 말라고 했던 얘기가 기억난다.


8월에는 운이 좋게도 지원했던 회사 중 가장 가고 싶었던 곳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서류, 과제, 두 번의 면접, 처우 협의까지 약 3달이 걸렸다. 전형을 준비하던 중 다양한 기업에서 오퍼레이션을 받았고 제안을 모두 거절하며 전형을 진행했기 때문에 떨어지면 억울할 뻔했지만, 붙을 거라고 생각을 못 하긴 했었다. 커리어가 꼬여버린 것 같아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 어려웠는데 다행이었다. L에게는 종종 전화가 왔다. 매일매일 편지를 쓰고 답장이 오는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수취인 사인을 하며 웃음을 숨기지 못하는 나를 보시고 우체부 아저씨도 같이 웃어주셨다.


9월에는 입사를 했다. 새로운 회사의 문화는 어려웠지만 다정하고 따뜻한 동료들 덕에 큰 문제없이 적응해 나갔던 것 같다. 거칠고 날 것이었던 스타트업에만 있다가 뭔가 코팅된 것 같이 매끈한 환경에 들어와 보니 신기했다. 이곳도 예전에는 누구보다 거칠고 날카로웠을 것이다. 끊임없는 사포질을 통해 도달한 것이 분명한 것들에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L은 자대 배치를 받았고 연락이 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많이 싸웠다.


10월에는 학교 수업 들으랴 회사 적응하랴 정신이 없었다. 회사의 큰 행사 하나를 챙기느라 평소 다뤄보지 않은 플랫폼들에도 익숙해지고 함께 협업하는 인원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이름과 얼굴 외우는 것도 큰 태스크였던 것 같다. 아 그리고 10월에는 이사를 했다. 어떤 위치에 집을 구하면 좋을지, 월세가 좋을지 전세가 좋을지 대출을 받을지 말지 결정하고 부동산을 돌아봤다. 기존 집의 보증금 반환 관련하여 문제가 생겨 며칠간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심사숙고하여 결정한 집은 옵션이 없는 축에 속했기 때문에 가구까지 모두 신경 쓰느라  손이 많이 갔다. 이사는 힘들었지만 삶의 질은 큰 폭으로 상승했다. 재택근무와 비대면 수업의 장기화로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에 온 집의 구석구석을 신경 써서 꾸몄다.


11월, 내가 생각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울함을 이겨보려고 보컬 클래스를 등록했다. 주 1회, 연습실에 가서 선생님과 노래를 했다. 24년 만에 이제야 내 목소리를 제대로 마주할 용기를 얻게 되어 의미 있는 수업이었던 것 같다. 오래전부터 덕지덕지 새로운 옷을 입혔던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미용실에 갔다. 감사하게도 선생님께서 원형탈모를 발견해주셔서 빠르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탈모는 내가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이기 때문에, 바로 정신과 등록을 해서 약을 처방받았다. 아, 그날 밤 L에게 차였다. 가장 견디기 힘든 밤이었다. 이틀에 걸쳐 울었더니 너는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운다고 해서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L에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난 그날부터 천천히 L을 떠날 준비를 했다. 배려해줘서 고마워.


12월, 풋살을 시작했다. 집에만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에너지가 자꾸 안으로 쌓여 우울해지는 것을 더 이상 견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니들과 소리도 지르고 욕도 하며 풋살을 2시간 뛰면 정말 생각이라는 걸 할 겨를이 없다. 그냥 졸라 앉아서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그게 너무 좋고 행복했다. 풋살을 하고 개운해질 때면 문득 조금씩 L을 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래서 놓아줬다. L은 끝까지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고 나는 그 말을 곡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혼자 살아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친구, 선배, 언니, 오빠들과 더 친해졌고 동기들과도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해가 바뀌는 자정에는 B언니와 우리 집에서 Seasons of Love를 들었다. 내년은 올해보다 더욱 사랑하고 나눌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며,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소중하게 입에 담으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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