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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름모 Nov 13. 2022

엽편, 습작, 미완

아. 오늘은 잘못된 일이 너무 많았다. 여자는 오늘을, 내일을 위한 20여 시간의 습작기였다 여기고 투두둑 뜯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주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고 싶은 하루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삶은 스케치북이 아니라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여자는 "반려"도장이 찍힌 A4용지를 파쇄기에 넣으며 오늘을 파쇄하는 상상을 하지만 조각조각 갈리는 것은 순도 100%, 손바닥 네 개 크기의 종이뿐이었다. 그 얇은 나무들이 죽어버리는 몇 초에도 여자는 반려와 중력을 감당하며 서 있어야만 했다. 여자는 숨을 뱉으며 카디건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너 요즘 왜 그래?

팀장이다. 여자는 본인의 '요즘' 이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생각했다. 그러다 알아차렸다. 상대방은 여자의 '요즘'이 아닌 '왜 그래'를 궁금해하고 있다. 그나저나 팀장의 반지 위치가 바뀌었다. 아침에는 약지에 끼고 있었는데, 지금은 맞지도 않아 보이는 중지에 끼워져 있다. 애인과 싸운 모양이다. 여자에게 굳이 걸어와 말을 건 이유에는 분명 그 이유가 소금 한 톨 만큼이라도 포함된 것이다.


- 제가 왜요?

- 요즘 무슨 일 있어? 뭘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회의록은 정리해서 혼자 보는 건지... 공유도 안 하고. 태스크 정리 잘하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모르겠으면 질문을 하던가, 신입도 아니고 요즘 왜 그래.

- 아뇨, 별일 없어요. 잘하겠습니다. 요즘 정신이 없나 봐요.


여자는 실제로 별 일이 없고 요즘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담배 냄새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출입증을 태깅해 자동문을 열고, 초록 부직포가 깔린 책상에 앉아 존나 느린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지만 특별한 일은 없다. 여자는 스스로 백번도 넘게 물었다. 왜 매 달 231만 원씩 따박따박 나오는 이 직장이 싫어진 거니?


뜯어내도 종이 찌꺼기가 스프링 여기저기 남아 맑은 내일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여자의 하루는 무언가 바뀌어도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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