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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름모 Nov 27. 2022

디스크조각모음2

1

(중략)

- 비슷한 경험이 있으면 노래를 더 잘 부를 수 있대. 그래서 다음 시간까지 무조건 만들어가기로 했지.

- 안데르센은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더 환상적인 동화를 쓸 수 있었던 거지. 이렇게 접근하면 경험이 필요 없을 수도 있는 거 아닐까?

- 난 안데르센이 아니니까. 또 모든 이야기는 읽혀야 비로소 완성되잖아. 안데르센이 표현해낸 어쩌면 허구 일지 모르는 것들이 독자들에게는 경험 기반으로 읽혔을 거야. 창작은 진짜가 없는 채로 시작되는 게 더 아름다울 수도 있겠어.

- 해석도 그런가?

-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들은 나에게 재료가 없을 때 읽었던 것들이야. 하지만 이야기가 좋아진 시점은 마침내 재료가 생겼을 때인 것 같다.

- 그럴 수도 있겠다.


2

2022년이 한 달 조금 넘게 남았다. 2023 기술 교육 준비를 9월부터 하고 있기에 2023이라는 숫자를 가진 새해는 지나온 다른 1일보다 덜 낯설것이다. 고민보다 고,를 선택했던 24살을 머지않아 보낸다. 생각이 많은 것에 조금 질렸었다. 해버리고 후회하자는 무의식을 토대로 이런저런 관계와 일들을 만들었다. 그중에는 잘 된 것도 못 된 것도 애매하게 사라져 버린 것도 있다. 이전에는 신중했기에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던 자괴감들과 시리게 자주 눈을 맞춰야만 했다. 외면하는 유일한,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손톱으로 다른 곳에 꾹꾹 생채기를 내는 것이다. 한 해를 걷다 우울도 많이 만났다. 우울함의 깊이와 크기를 재기도 했다. 각자의 우울이 더 값지다 말하는 이들도 만났다. 그럴 때면 나도 집에서 혼자 내 우울의 무게를 달아보곤 했다.


3

자취방 창문을 열면 맞은편에 보이는 가정집에 오늘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달렸다. 저 집 자주 싸우는데... 아저씨가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도 자주 나는데, 그래도 11월부터 조명을 붙여둔 걸 보면 요즘 가족 애정도가 높은가 보다. 역시 연말은 이상한 힘이 있다. 작년에도 썼던 장식을 베란다에 붙여둔 저 집이 조금 부러웠다. 본가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내줄까, 잠깐 생각했지만 그만뒀다.


4

마음이 영 불편한 하루가 있다. 내 삶에 오밀조밀 무언가가 너무 많아 충만하기에 되려 답답했다. 이 기분을 한 단어로 정의하고 싶어 고민하다가 "에어 완충재 기분"이라고 정했다. 로켓 배송을 받으면 비닐 완충재가 같이 온다. 빵빵한 기체를 머금은 초록빛 비닐. 무슨 기체인지는 모르겠지만 "에어 완충재"라는 이름을 쓰는 걸 보면 공기를 넣었나 보다. 너무 탄력 있게 부풀어있어서 버리기 전 구멍을 낼 때 문득 무언가를 고장 내버리는 기분이 든다. 완벽하게 자기 역할을 하는 그 비닐을 망가뜨리는 건 가위, 칼 사실 손톱으로도 할 수 있을 만큼 쉽다. 또 불가피하다. 나는 내 하루에 구멍을 내고 싶었다. 가스를 빼서 쪼글쪼글한 비닐로 남아 잠이나 자고 싶었다. 아직도 난 에어 완충재 기분을 느낀다. 구멍을 내려고 이것저것을 해보고 있지만 내 비닐은 두꺼운지 구멍 하나 내는 것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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