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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Nov 19. 2020

미친 X과 행복한 사람의 공통점

행복한 삶의 비결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원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 주변에서 행복해하는 사람을 찾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간혹 가다  “ 지금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그동안 간절히 바라던 것을 지금  이룬 사람이거나, 혹은 이제  사랑에 빠졌다거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이러한 사람은 누가 봐도 행복한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가지 공통점을 찾을  있다면 ‘ 이상 바라는 것이 없는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하기사 간절히 원하던 것을 막 이루었는데.. 이제 막 사랑에 빠졌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추론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상태가 곧 행복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바로 평온한 상태이다. 잔잔한 호수와 같이  평안한 마음의 상태이다.



행복한 사람과 미친 사람의 공통점


그동안 우리는 행복에 대해 너무나 정서적 측면, (혹은 정반대로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해왔다. 그래서 행복하냐 하는 질문에선뜻 대답 못하고 망설이게 된. 물질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행복한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하면 우선 입꼬리가 귓가에 걸려있는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 기쁨에 겨워 마냥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상태 말이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오기도 하겠지만...  만일 하루 종일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이 혹시 주변에 있다면우리는  사람을  보살펴 주어야 한. (십중팔구 머리에 커다란 꽃을 꽂고 있거나 입가에 침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다


 행복은 감성적인 면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감정만의 상태는 아니다. 만일 감정만의 상태가 행복이라면 우리는 약물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행복이라 일컫지는 않는다. (약 빤 놈이 행복하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이와 비슷하게 사랑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랑’ 하면 우선 뜨거운 열정 등의 감정적인 부분을 생각한다. 한 순간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금방 죽을 것 같은 뜨거운 마음, 손등만 스쳐도 짜릿함이 느껴지는 어떤 감정.. 그런 것들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랑에는 그러한 면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만일  나만의 감정이 사랑의 전부라면 경우에 따라서 그것은 굉장히 무서운, 소름 끼치는 모습을 띌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나의 좋아하는 감정일 뿐이다.


사실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소위 ‘사랑’이라고 말하는 이 개념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사랑’이라고 부를 뿐이다. 우리의 언어가 가지는 한계다.

“ 평안하뇨?”


다시금 행복의 문제로 넘어와서, 조금  우리는 행복의 개념을 평안의 개념으로 살짝 바꾸어 생각해보았다. 이제 질문을 바꾸어 당신 “평안하십니까?” 묻는다면 어떤 답을   있을까?

사실  물음은 부활의 아침, 예수께서 무덤가에서 자신을 찾아 나선  여인에게 던진  물음이기도 하.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평안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행복’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시상식 같은 데서 소감을 물어보면 한결같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라고 말하는 것을 보곤 하는데.. 정작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우리의 평안, 우리의 행복이란 소리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쥐어짜듯  드려서 그분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지도명하시지도 않았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을 즐거워 함으로써, 하나님을 만족해 함으로써,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해 함으로써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이.

 
다시 말해 하나님 우리의 행복, 우리의 평안을 그토록 원하신 다는 말씀이다.



또다시 생기는 의문..


우리도 그토록 원하고.. 하나님도 우리의 행복을 그렇게 원하시는데..

 그렇게 우리 주위에

행복한 사람, 평안한 사람을 찾기가 힘든 걸까?


 이다지  우리 가운데서 행복, 만족, 평안 찾기가 힘든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엉뚱한 곳에서 찾기 때문이다. 

'연목구어'라는 말이 있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나무에 오르는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말이다.

물고기는 연못에 가면 많이 있다. 다만 전혀 엉뚱한 곳에서 찾기에 잡  뿐이다.


우리는 행복, 평안, 만족함을 추구한다.  만족함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워 넣는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는 중요한 사실  가지가 있다.  
바로 우리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 빠진 항아리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다. 



 빠진 항아리 인생


어쩌면 우리네 인생은 우리의 욕망이 빚어내는 만족감이라는 항아리를 채워 넣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언제 채워질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퍼붓다 보면 언젠가는 채워지겠지'라는 소망을 안고 열심히 살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본.  '항아리가  채워지는 나는 정말 행복할  있을 거야'라는 소망을 안고 우리는 멀리 강가에 내려가 물을 퍼다 나른다.

 
그러나 바닥에 구멍이 뚫린 항아리는 우리가 '조금만 , 조금만 더'  하며 바쁘게 물을 길으러 내려간 사이 밑으로 물을 흘려보낸다. 도저히 채울 수 없는 항아리인 것이다.




사실   빠진 항아리를 일순간에 가득 채우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있다.

항아리를 강물 속에 집어넣으면 된. 강물과 항아리가 하나가 되고 나면 채우고 말고  것이 없어진다.

그저 깨진 항아리의 모습을  '나의 자아'를 강물 속에 버려버리기만 하면 된다.

 누구도 힘들게 멀리 강가까지 가서 물을 퍼다가 채우라고 명하지 않았다.

우리가 밑 빠진 독에  붓기의 어리석음을 범하는   가지 이유는...  우리의 고집 때문이.

끝까지 강물과 분리된  고집스레 버티고 서있는 '깨진 항아리'와 같은 '자아'의 고집일 뿐이다.


우리는 평안과 만족  다른 곳에서부터 가져와 채우려 한.

우리는 평안과 만족을 늘 상대적인 것으로부터 찾는다.

그래서 우리의 평안과 만족에는  조건이 따라붙는다.

내가 돈이 많으면 행복할 텐데…”, "  잘생겼으면, 좀 더 날씬했으면 행복할 텐데…"  

이놈의 ' 텐데 귀신'이 늘 따라붙는다.




우리 비극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욕망 덩어리,   빠진 항아리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는 것이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욕망, 아름다운 이성을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 좋은 직장을 얻고 싶은 욕망, 자식이 공부를 잘했으면 하는 욕망….

이처럼 욕망은 우리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한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지만 결국  빠진 독에  붓기와 같다.

짜장면이 먹고 싶다는 욕망에 집착하다가 마침내 그것을 먹게 되었을  우리는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포만감을 느끼는 순간  행복감은 사라지기 시작하고 그것이 사라진 빈자리는 어느새 권태로 채워진다. 이러한 권태는 한동안 지속되다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새로운 사물이 나타나서 그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에 다시금 사로잡히게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또다시 충족되지 못한 새로운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게 된. 짜장면이 주는 만족감이 그렇고, 새집, 새 차,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이 주는 만족감과 행복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떤 염세주의 철학자는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지만  천국이든 지옥이든, 설사 존재한다 할지라고 우리는 그곳에서 역시 고통에 시달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모든 욕망이 충족된 천국에서는 권태로 인해 고통에 시달릴 것이고, 마찬가지로 지옥에서는 온갖 결핍으로 인해 또한 시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허탈하지만 슬프게도 공감이 되는 말이다.



항상 깨어 있으라


우리가 이러한 비극으로부터 헤어 나오는 방법은 ‘항상 깨어있는 것’이다.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은 잠을 자지 말고 버티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깨어있는 의식으로 '본질적인 것'을 구하라는 말이다.

우리의 평안함과 행복감을 어떤 외부적 조건이나, 상대적인 것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으로부터 찾으라는 말이다.

사실, 참된 평안과 만족은 상대적인 것, 조건적인 것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참된 평안과 만족을 상대적이고 외부적인 것으로부터 찾는 것은 마치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은 일이다.  


파랑새


어려서 읽었던 ‘파랑새라는 동화 속에서도..

꿈속에서 그토록 열심히 좇았던 파랑새는 아침에 깨어보니 자신의 방안에  그냥 그대로 있었다.

서두에.. 행복을(만족함을) 그저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태라고 말했을  

 말이 무언가 거창한 말이 아니다.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태란 그리 거창할 것이 없다. 그저 자연스러운 상태일 뿐이다. 마치 파랑새가 방안 새장에 늘 있듯이..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이 자연스러운 상태일 뿐이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는 이상  이상 바랄 게 없기 때문이다. 

신약 성서에서 우리의 구원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설명을  들어보면 (무엇인가 복잡하게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지 사실을 줄기차게,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바로 하나 됨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에 대한 강조이다.

 사상이다.


가지가 나무가  몸인 상태, 팔다리가 몸과  몸인 상태, 이러한 자연스러운 상태가 가장 편안하고 또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상 덧붙일 것도, 바랄 것도 없는 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비결

그러한 자연스러움, 평안함, 만족스러움은 어디에나 있다. 지금 당장에라도 우리는  평안함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있다. 아니 우리가 바로  자체이다.


우리가  일은 그저.. 그것을 누리는 것뿐이다.

이다음에  많이 벌면,   쌓아두고 나면..  아니라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우리의  가운데에서   것이다.


어떻게?라고 묻지 말자.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저 이 순간을 누리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그만이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걱정에 이끌려 다니는 한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이 나에게 진정한 선택의 자유를 허락해 준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지 말고...

한낱 들에    송이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자신의 존재함을 누리면 되는 것이.


.. 이것이 행복한 삶의 시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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