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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Nov 29. 2020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짧은 생의 덧없음과 변화를 주제로 하는 그림을 ‘바니타스(Vanitas) 화라고 한다.
일반적인 바니타스 화에는 죽음의 필연성을 상기시키는 두개골, 시든 꽃, 연기, 모래시계 등이 포함된다.

바니타스(덧없음, 헛됨)라는 말은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전도서에 쓰인 ‘바니타스 바니타툼 옴니아 바니타스(‘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의 글귀의 첫 단어를 따온 것이다.

전도서는 솔로몬 왕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까지 지구 위를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마도 솔로몬 왕만큼 모든 것을 완벽하게 누려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은 대개 몇 가지로 범주화할 수 있는데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재물과 명예 그리고 건강이 아닐까 싶다. (혹자는 보다 높은 차원의 복을 생각하겠지만 나를 비롯한 일반적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재물과 명예 그리고 이를 누릴 수 있는 건강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싶다)

솔로몬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인간이 이 땅 가운데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을 다 누린 사람이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모든 권력의 정점에 있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 아니 심지어는 주변 국가들에게서 조차도 진심 어린 존경과 흠모를 받았다. 그의 지혜로움을 한 번이라도 접해 보고자 남쪽나라 시바의 여왕은 금은보화를 바리바리 싸들고 ‘산 넘고 물 건너셔’ 먼 길을 행차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요즘도 빌 게이츠나 앨런 머스크 같은 사람은 부와 명예를 모두 누리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어디 감히 와이프를 1,000명이나 거느린 솔로몬에게 비할 수 있으랴.

그런 솔로몬이 인생 말미에 자신의 삶을 총 정리하는 듯한 분위기로 쓴 책이 바로 ‘전도서’라는 책이고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름 아닌.. 삶의 덧없음.. 헛됨이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누려본 사람의 진심 어린 독백인 것이다.
  
삶이 헛되다는 말은 자칫 냉소적인 허무주의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성경의 전반적 주제는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은 ‘생명’을 전제로 한다.

생명 있는 존재라야 비로소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글자 한 글자를 허투루 다루지 않는 성경책에서 냉소적인 허무주의를 다룰 리가 없기에

솔로몬의 전도서가 전하는 메시지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수많은 경험을 한다.
아니.. 경험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은 다름 아닌 ‘나의 행복’이다... 즉 복을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심지어는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마저도 “이번 생에서의 막다른 골목을 저버리고 나면 보다 나은 다른 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적어도 이 생보다는 낫겠지하는) ‘복을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라고 파스칼은 말한 바있다.

자신의 행복,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 볼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 실제로 다 해봤던 사람이 쓴 책인 ‘전도서’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의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헐..     뭐 어쩌란 말인가? 자기는 해볼 것 다 해봤으니.. 아쉬울 것 없다는 소린가?..
이런 마음이 드는 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아냐? 나만 쓰레기야?)

그러나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자. 솔로몬이 뭐가 아쉬워 인생 말미에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한 명쯤은 인생의 참된 의미를 논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시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솔로몬 같은 사람 말이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위해 엉뚱한 방향(재물과 명예)으로 달려가는데.. 단 한 명쯤은 그 길이 아니라고.. “내가 가봤는데 정말 아니었다”라고 자신의 인생을 걸고 외칠만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허풍쟁이 거나 어수룩한 사람이 아닌.. 한 나라의 지혜로운 군주로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곧 법처럼 시행되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처럼 말의 무게가 있는 사람이


“해보니까 별거 없드라” 정도가 아니라...
”아.. 인생 헛지랄했다. 너희들은 그런 헛지랄하며 시간 낭비하지 말아라...”라고 말해야 된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요즘에도 가끔 수준 있는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에서도 참된 행복의 의미를 전하려 하는 작가나 감독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작가나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수긍하며 감동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뿐.. 책을 덮고 나면, 영화관을 나서고 나면..
우리의 선택의 기준은 다시금 그리고 언제나..  ‘나의 행복, 나의 만족’을 위한 ‘물질’과 ‘명성’에 있다.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도.. 좋은 대학에 가야 하는 이유도...

교회를 열쓈히 나가는 이유도.. 나가서 기도를 열쓈히 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다..

솔로몬이 내렸던 결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의 계명을 지키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다.

솔로몬이 ‘그(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했을 때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은 다름 아닌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찮은(?) 계명은 오로지 그것을 명한 자를 두려워할 때만 지켜질 수 있기에 이 둘은 한 가지 계명이나 마찬가지다.


신약에 와서 예수는 동일한 계명을 더욱 강조했다. 이웃을 사랑하되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 형제들끼리 서로 아껴주지 않고 다투면 부모님에게 혼줄이 나곤 했다.
‘서로 사랑하라’는 부모님의 계명을 어기면 혼이 났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부모님의 회초리가 무서워 그 계명을 지켰던 것이 아니었다.

형제를 사랑하면 온 집에 평화가 깃들게 되고.. 결국 그 집안 속에 거하는 나에게도 유익함과 더불어
부모님께로부터 칭찬과 보상을 받을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야 말로 나에게 진정한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인생을 가장 복되게 만드는 비결인 셈이다.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아 본 솔로몬이 인생 말미에 깨달은 사실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솔로몬 쵝오!

 

바니타스 정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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