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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Nov 01. 2020

스타벅스 교회

사랑 한 모금하실래요?

스타벅스 같은 교회를 세우는 게 내 꿈이다.


길을 가다 눈에 띄면 언제라도 들러서 머물다 가고 싶은 곳..  들어서면 그저 마음 편하게 조용히 상한 심령을 충전할 수 있는 곳.. 따사로운 햇볕과 향긋한 내음이 감도는 곳..


그렇게 머물다 보면 어느새 몸도 마음도 맑아지고 심적으로 힘을 얻어가는 그런 장소 말이다.


스타벅스에서는 돈을 내고 커피를 사야만 하지만.. 돈 대신 상한 심령을 내려놓고 따뜻한 은혜와 사랑을 얻어가는 그런 교회 말이다.


거룩하고 성스러운 교회를 세속 문화의 대명사인 한낱 스타벅스에 비유하다니.. 화를 내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스타벅스의 포근한 분위기를 좋아할 뿐이니 그리 열내지 마시라..


목사지만 나는 보통 스타벅스에서 책을 읽고 글도 쓰고 목회 상담도 한다. 딱히 출근할 교회 건물이 없어서 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왠지 그곳에 가면 책도 글도 상담도 잘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팬데믹 때문에 나의 목회활동(?)에 타격이 크다.ㅠㅠ)


그래서 교회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교회란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라디오 스타’스런 질문을 해본다.   목사에게 교회란?..


 직장?    음.. 솔직히 맞는 말이긴 한데 너무 직설적이다. 맘에 안 든다.


그리스도의 몸?  음.. 이건 신학적으로 백퍼 정답이긴 한데.. 왠지.. 예전에 개콘의 ‘몸뚱아리’가 떠오른다. 맘에 안 든다.




‘교회’라는 단어의 뜻부터 다시금  생각해 본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교회’로 잘못 알고 있는 그곳은 정확히 말하자면 ‘교회 건물’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교회’가 모이는 ‘예배당’이다.


우리의 머릿속에 교회가 십자가 걸려있는 웅장한 건물로 인식된 것은 사도 바울이 각 지에 최초로 교회를 세우고 다니기 시작한 AD 1세기 훨씬 이후의 일이다.  직접적으로는 AD 4세기경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밀라노 칙령’으로 알고 있는 그 사건 이후로 변화된 교회의 모습이다.  


1세기 중반 무렵, 최초의 교회가 생겨났을 당시의 교회의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예를 들어 ‘빌립보 교회’라 하면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교회건물이 아닌) 빌립보 교회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 사람들이 집 안에서 모였건 강가에서 모였건 들판에서 모였건 그건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그저 그 모임에 가면 볼 수 있었던 친근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동창회’ 하면 떠오르는 것이 ‘모임 장소’가 아니라 익숙한 동기들의 얼굴이 듯 말이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초기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게 된 데에는 ‘공간이 가지는 힘’의 역할이 크다.


‘알뜰 신잡’으로도 유명한 홍대 건축학과 유현준 교수에 의하면 공간이 권력을, 특히 종교 권력을 만들어 내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배용 장의자(한 의자에 최대 8~10명까지 앉을 수 있는 교회의 기다란 예배용 의자)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열 지어 늘어선 장의자에 일단 앉게 되면 청중의 시선은 자연히 앞을 향해 고정되게  된다. 일방적으로 듣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중간에 일어서 나가기 애매한 장의자의 특성상 청중들은 좋으나 싫으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시간 동안 단상을 쳐다볼 수밖에는 없게 된다. 이때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이 쳐다보게 되는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간과 장소를 강제하는 것 자체에 어마어마한 권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똑같은 설교 말씀을 들어도 인터넷으로 집에서 듣는 것과 실제로 교회 예배당에서 듣는 것과는 마음가짐에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공감이 가는 말이다.




달라진 것은 단어의 뜻만이 아니다. 교회의 예배 모습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최근 들어 발견된 서기 3세기 경의 교회 유적을 살펴보면 주일의 교회 풍경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에 발굴된 두라-유라포스 유적지의 교회는 지금까지 발굴된 교회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더욱이 이 유적지는 AD 257년에 땅 속에 묻힌  이후 다른 어떤 마을도 다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도시 모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고고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다고 한다.


유적을 연구해 본 결과 이 교회는 큰 규모의 가정집 형태를 갖고 있었는데 예배 장소로 쓰였을 커다란 홀이 있고 세례를 위해 쓰였던 방에 그려진 벽화들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AD 235년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아마도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초기의 교회 모습이 아닐까 한다.

 


고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해 보면  당시의 주일 풍경과 예배 모습을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주일 오전이 되면 종교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 가운데 로마의 상류층 주택을 개조한 예배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예배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었는데 오늘날의 교회처럼 1부 예배 후 교회를 우르르 빠져나가고 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2부, 3부, 심지어 4부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예배의 순서가 1부와 2부 순서로 나누어진 것이다.


1부 예배는 주로 말씀 중심으로 행해졌고 이어지는 2부 순서는 성찬식이었는데 오늘날 교회의 성찬식과 다른 점은 그야말로 함께 식사를 나누는 리얼 식사 모임이었다는 점이다.


1부 순서 또한 강단에서 일방적으로 말씀이 선포되는 오늘날의 예배 모습과는 달리 질문과 응답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물리적으로 기껏해야 20~30명 모이는 모임이었기에 연출 가능했던 예배 모습이기도 했겠지만 당시 예배 자체의 지향하는 바가 오늘날과는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초대 교회의 예배에서 설교는 설교자의 설교 능력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다. 설교자의 가장 큰 자질 중 하나는 그저 사도들의 편지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사도의 글을 길게 낭독하는 것이 설교의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 본문에 대한 강론이 있기는 했지만 오늘날처럼 본문을 쪼개고 분석하고 감동적인 표현과 설교자만의 독창적인 인사이트와 풍부한 유머, 화려한 수사 등이 동원될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저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어떻게 말하고 가르쳤는지를 성서를 찾아 읽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당시의  이러한 1부 예배 모습을 굳이 재현해 보자면..


설교자가 사도 바울의 편지글 중 하나인 에베소서를 천천히 낭독한다. 마침 읽고 있는 부분이 에베소서 6장 5절의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는 부분이다.


낭독을 듣고 있던 참석자 중의 한 명이 노예 출신인데 공손히 질문을 한다. “목사님 제가요.. 힘들더라도 제 주인의 명령을 따르라는 말씀은 어떻게든 받아들이겠는데요..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니요?  이건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바울 사도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종으로서 주인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주인 또한 한낱  인간에 불과할 뿐임을 알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를 불쌍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비록 그가 지금은 주인의 신분으로 서 있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는 똑같은 한 영혼일 뿐이지요. 언젠가는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설 텐데 그때는 자신이 형제에게 저지른 일들을 얼마나 후회하게 될까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 하듯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식의 대화식 설교는 오늘날과 같이 한 시간 내내 쉬지 않고 목사 혼자서만 말하는 설교와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오늘날 대형화된 교회의 주일 예배 모습을 한 번 떠올려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가운데 온갖 소음과 주변 사람들의 시선.. 1주일 만에 얼굴 보는 사람들과 쉴 새 없이 나누는 겉치레 인사들..   예배 후 해야 할 수많은 할 일등..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과연 예배가 약속하는 평안과 기쁨과 위로를 우리가 얼마나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스타벅스 같은 교회를 꿈꾼다.


누구나 지나가다 들어와 머물고 싶은 곳.. 그저 상한 마음, 지친 어깨 내려놓고 한 없이 멍 때리다 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곳..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곳.. 따사로운 햇볕과 향기로운 내음이 가득한.. 그런 곳.


그렇게 평소에는 열려 있다가도 주일 오전이 되면..

비록 초대 교회처럼은 아닐 지라도 최소한

서로 간에 인격적인 나눔과 소통은 가능한 교회 말이다.


그러려면 우선 규모는 작아야 하겠다.


내가 생각하는 교회 예배당이 이상적 크기는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될 수 있는 사이즈다.


아울러 말씀을 전하는 자와 말씀을 듣는 자 사이에

눈빛으로 교감이 충분히 가능한 크기여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말보다는 눈으로 더 많은 것을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두라-유라포스 교회의 예배실 정도 크기이지 않을까 싶다.


거기다가 스타벅스처럼 밝고 은은한 분위기에

커피 향도 좀 풍겼으면 한다.

(꼭 커피는 아니어도 따뜻하고 향긋한 내음이라면 뭐라도 좋을 것 같다.

 옥수수차 끓일 때의 구수한 향내처럼 말이다..)


어서 팬데믹이 끝나고 스타벅스에 가 앉아서 책이라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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