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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Nov 01. 2020

교리와 진리는 다르다..

정말 그렇다.

교리는 진리가 아니다.

정말 그렇다. '교리'는 일종의 이론인 반면에 진리는 실제이다.

이론은 실제를 정리해 놓은 것에 불과한 반면, 실제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다.
진리는 우리가 삶 가운데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이지 책에 정리된 이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리와 진리는 엄연히 다르다.


나는 목사다. 그것도 교리에 목숨을 거는 개신교 개혁교단의 목사이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이고(성경책), 책이 말씀하는 바를 목숨과도 같이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그 책의 내용을 정리, 요약한 바를 ‘교리’라고 하고, 그것은 곧 진리로 여겨진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교리는 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책은 틀림없는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누가 책의 내용을 해석하고 정리했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똑같은 성경책이 말하는 바를 장로교에서 요약, 정리했을 때와 감리교에서 정리했을 때.. 그 결과는 사뭇 다르다. 그리고 서로가 자기의 주장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은 누군가의 손을 들어줄 최종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ㅠㅠ)

우리는 진리를 주장하기보다는 단지 진리를 체득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동양 고전 중에 ‘장자’라는 책의 ‘천도’ 편에 유명한 ‘윤편’의 일화가 있다.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이 당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이 수레바퀴를 깎다가 환공에게 물었다.

“감히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책은 무슨 내용입니까?”

     “성인의 말씀이다.”

 “성인이 지금 살아 계십니까?”

     “벌써 돌아가신 분이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이군요.”  

환공이 벌컥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목수 따위가 감히 시비를 건단 말이냐. 합당한 설명을 한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자 윤 편이 대답한다.

“신의 일로 미루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굴대가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니게 정확하게 깎는 것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뿐, 입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더 깎고 덜 깎는 그 어름에 정확한 수치가 있을 것입니다만, 신이 제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신으로부터 전수받을 수 없습니다.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책에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이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장자는 윤편의 입을 통하여 이른바  ‘이론’에 빠져 (누군가의 해석에 빠져..) 실제의 파악에 소홀히 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발 딛고 서있는 곳은 ‘이론’이 아닌 ‘사건’의 세계이다. ‘이상’이 아닌 ‘일상’이고, 보편의 세계가 아닌 구체적 실제의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게도)... 보편적 이론을 공부하는 데에는 적극적인 반면, 구체적 일상을 관리하는 데에는 소홀히 한다. 조직체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데에는 열심인 반면 정작 ‘나’로서 살아가는 데에는 머쓱해한다. 삼성이나 현대에 다니는 나는 힘이 있지만 그 명함을 잃어버리는 순간 나는 힘을 잃고만다. 한마디로 주체로서의 힘이 없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감당할 힘이 없다는 말이다.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옆에서 지켜보며 훈수를 두는 일은 쉽다. TV로 축구 경기를 지켜보며 선수를 평가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훈수만 두는 사람이나 관객은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누구나에게 자신만의 바둑판, 자신만의 축구장, 자신만의 무대가 주어진다. 바로 인생이라는 무대이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오로지 나 자신만이 맡을 수 있다. 우리는 옛 성현의 가르침이나 남들의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숙고해보고나 경험해 보지 않은 가르침이나 충고는 나의 무대를 빛내기 보다는 어색하게 만들 확률이 크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나의 인생은 온전히 나를 위한 무대이기 때문이다.


실패한 무대 뒤에서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은 결코 개혁가가 될 수 없다.

그러한 사람은 주체로서의 자신의 변화는 뒤로 한 채 그저 그가 속한 공동체의 개혁만을 부르짖는 입만 살아있는 불평분자일 뿐이다. 개혁가와 불평분자는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고 지적하는 부분에서는 일견 같아보이지만 그 부분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이처럼 전혀 다르다. 


내 삶의 개혁, 내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경험하고 정리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이론과 해석에 의지해 내가 아닌 '우리'의 개혁만을 주장한다면 그는 분명 개혁가가 아니라 불평분자일 확률이 높다. 






예수님 당시에도 개혁자들이 존재했었다.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당시 로마 권력과 손잡은 부패한 종교적 지도층이었던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신앙의 순결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청렴했으며 스스로의 삶에 엄격했다. 조상이 남겨준 신앙 전통과 교리에 따라 철저하게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들은 정말로 교리에 능통한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그토록 심한 쌍욕을 쳐들어먹은 이유는 무엇 일까?

그들은 자신이 정리하고 이해한 바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단지 조상들이 기록하고 해석해 놓은 것에 목숨을 걸고 오로지 그것만이 진리하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라는 율법을.. 왜 그러해야 하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고 고민해 보지 않은 채, 그저 목쑴걸고 충실히 지켰고(거기까지는 인정.. ) 더 나아가 안식일에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 득달같이 달려가 생 지랄을 떨었던 것이다. (예수님한테 까지도 말이다. 아 놔 이거)


진정한 개혁은 단지 자신의 주장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개혁은 본질에 충실하는 것이며 그 의미를 되살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목숨을 건 율법 준수가 아니라 단지 심플한 ‘사랑의 실천’이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주장했던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결국에는(복잡한 율법 준수가 아닌) 단순한 이웃사랑의 실천으로서만 드러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그리 어려운 결론도 아니고 성경을 차분히 읽어 내려가면 누구나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다.(정말 그렇다..)

율법 준수를 위해 (다른 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소 한 마리를 구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은 신나게 비웃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리 큰 차이가 있을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교리나 주장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사람들을 보면 

득달같이 달려가 생지랄을 떨어야 직성이 풀리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그 옛날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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