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가 그런 것이었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by 이동엽

고등학교 때 시험 준비하느라 뜻도 모른 채 무작정 외우기만 했던 단어들이 있다.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 밀의 질적 공리주의가 그런 단어들이다.


시험 문제에 벤담이 나오면 우리는 무조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찍어야 했다.


학창 시절 그렇게 피상적으로 공부했던 까닭에 최근까지도 나는 '공리주의'라는 말의 뜻을 잘못 알고 있었다.


우선 '공리주의'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개개인의 행복보다는 '공리' 즉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상이 아니다.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공리'는 그와는 정반대로 개개인의 행복의 합, 즉 총량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공리주의에서는 원칙적으로 개인의 행복이 우선이다. 공공의 이익이 앞서는 때는 그것이 개인의 행복의 총합보다 많을 때뿐이다.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

19세기에 공리주의를 체계화시킨 영국의 벤담은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행복은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이고 그 측정치는 곧 도덕의 기준이었다.


바꿔 말하면 유럽 역사상 종교와 무관한 윤리 이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것이 벤담의 공리주의 이론이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천재들은 언제나 발상의 전환에 귀재였던 것 같다)


벤담의 주장은 비판자들로부터 인간이 단순히 쾌락만을 추구하는 존재라면 돼지와 다를 바가 무엇이냐는 비난과 함께 '돼지 철학'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벤담의 사상에 매력을 느끼고 추종했던 사람 중에 제임스 밀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중에 벤담의 공리주의를 계승 발전시킨 존 스튜어트 밀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다.


밀의 질적 공리주의

선의 근거인 쾌락을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보았던 벤담과는 달리 밀의 공리주의를 질적 공리주의라 부른다.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가 비판자들로부터 돼지 철학이라고 조소당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돼지의 쾌락과 인간의 쾌락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 반박했다.


밀은 행복과 만족을 구별하여 행복을 만족보다 질적으로 우위에 두었다. 한마디로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질적인 쾌락을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단순한 쾌락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고급 예술을 제대로 경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꼭 내 말하는 것 같다 ㅠㅠ)


근데 그거 아는가?

밀이 공리주의자보다는 자유주의자로 더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그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 몇 가지의 원칙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중 일부를 살펴보면


- 표현의 자유 일부를 제한하면 모든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고 만다..

- 표현의 자유가 무제한 허용되어야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 등이 있다.


밀의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전 세계 자유주의 국가에서 기본적인 정치 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밀이 무조건적으로 모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표현하는 내용에는 제한이 없어야 하지만, 표현하는 방식에는 제한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하였다.

표현의 자유는 결국 사회의 발전을 위한 것이기에 전체적인 사회의 질서를 우선시하였던 것이다. 그는 표현의 방식을 대중연설이나 저술 등으로 제한해야지 폭력 등 명백하게 위험을 동반하는 방법은 안된다는 기준을 제시하였다.


밀은 또한 순수한 사랑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그는 24살 때 두 자녀를 가진 유부녀인 해리어트 테일러 부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불륜의 사랑이 아닌 정신적인 교감이었다. 그들은 서로 이성적으로 행동하였기에 세간의 주목을 받지는 않았다.


6년 후 밀의 건강이 악화되어 파리로 요양 갔을 때, 해리어트 부인은 남편의 허락을 받고 두 아이들을 데리고 파리에 가서 밀을 간호하기도 했다 (남편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20년 동안이나 순수한 교제를 지속하던 밀과 해리어트 부인은 그녀의 남편이 사망한 후 두 아이들이 증인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하게 된다. 결혼 7년 후 해리어트가 폐질환으로 죽게 되자 밀은 해리어트의 장례를 마친 후 부근에 집을 구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또한 밀의 말년에 그를 돌봐준 사람이 해리어트 부인의 장녀인 헬렌 테일러였다니 밀과 해리어트의 사랑이 얼마나 순수하고 진지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공리주의 이야기하다가 잠시 순수한 로맨스에 취해 삼천포로 빠졌다. 쏘리..


스펜서의 진보적 공리주의


공리주의를 언급하면서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스펜서다.

그의 공리주의는 벤담, 밀과 구분하여 '진보적 공리주의'라 부른다.


다윈과 동시대에 살았던 스펜서는 생물학과 진화론에도 관심이 많아 사회의 발전에도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사회 유기체' 설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든 것은 단순성으로부터 복잡성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동물의 진화, 인류의 진화, 그리고 사회의 진화, 우주의 진화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러한 생각은 현대 물리학에서 모든 변화와 진화에 대한 궁극의 설명으로 '모든 것은 경우의 수가 많은 쪽으로 변하게 된다'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열역학 제2법칙)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아님 말고..)


그는 또한 '사회는 쾌락과 도덕이 일치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라고 보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모든 사람이 도덕 법칙을 지킬 때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리주의의 문제점


언뜻 보면 그럴듯해 보이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표어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해 희생되는 소수자의 문제라든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해서 그것이 옳아야 한다는 논리상의 자연주의적 오류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기에 당시 수많은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공리주의는 이미 철 지난 철학 사조 중의 하나가 아니다. 공리주의 논쟁은 21세기 스마트폰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동영상을 보며 무료함을 달래는 이 시간에도 아프리카 대륙의 어느 한 지역에서는 굶주림에 지친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간다고 한다. 이들에게 하루 3달러면 굶주림으로부터 구해낼 수가 있다고 한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 하나면 적어도 2,3백 명의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쾌락이나 행복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생명 말이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이 시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는 모든 사람은 선이 아닌 악을 행하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비도덕적인 사람인 것이다.


한때 한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마이클 센델 하버드 대학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도 따지고 보면 결국 공리주의적 논쟁의 현대판 버전일 뿐이다. 공공의 이익과 개인적 사익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다. 정의가 결국 공평에 관한 문제라면 과연 어떤 것이 공평한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편에서 공평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남의 정의는 나에게는 부당한 것이거나 불공평한 것이 되고 반대로 나의 사익은 누군가에게는 부당함이요 불공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의를 정의롭게 정의 내릴 누군가가 필요한 순간이다..


나의 생각..


성경을 공부한 목사로서의 나의 답은 매우 간단하다.


나와 남을 한 몸으로 생각하면 끝이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하면 해결되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 대답이 만족스러운 해답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나와 남을 한 몸으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이고 남은 남일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에는 나와 남이 마치 샴쌍둥이처럼 육체적으로 연결된 한 몸임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한 핏줄, 한 가족을 연상할 때의 느낌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나와 남은 비록 육체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담을, 더 나아가 하나님을 공통의 부모로 삼는 하나의 가족, 하나의 공동체, 즉 한 몸이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의 행복으로 인하여 자신도 행복을 느끼듯이 한 몸을 이룬 모든 사람은 서로에게 행복의 원인이요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생각은 나와 남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는 허점과 모순점 투성이지만..


나와 남이 한 몸을 이룬 인류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세상에서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하바드 대학의 마 교수도 나처럼 이런식으로 생각했다면 공평과 정의에 관한 문제로 그리 골머리 썩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도 내 것인데 도대체 뭐가 문젠겨?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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