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불안

feat. by 하이데거

by 이동엽

공포는 명확한 대상을 가지고 있다. 고소 공포증은 높은 곳에 대한 공포이고 폐쇄 공포증은 닫힌 공간에 대한 공포이다.


반면 불안은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막연한 감정이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으로서 언젠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말이다. 그 막연한 감정의 끝에는 존재의 소멸, 즉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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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소멸한다.

그래서 존재는 언제나 ‘있음’보다는 ‘없음’을 통해서 그 의미가 더욱 잘 드러난다.



평소 만나기만 하면서로 으르렁 거리는 사이였다 할지라도 막상 없으면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없음으로 그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렇듯 존재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없음’이고 ‘무’이다.


어디 존재뿐이랴.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에 의해 가장 잘 드러난다.


빛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어둠이고

거짓이 있기에 진실이 돋보이며

못생긴 애들이 득실득실하기에 잘생긴 몇몇이 각광받는다(.......).




우리에게 가장 큰 공포와 불안을 안겨주는 것은 무엇일까?


두 말하면 잔소리.. 죽음이다.

죽음, 곧 존재의 소멸이 주는 공포와 불안이야 말로 모든 것을 압도한다. 이것이야 말로 근원적인 두려움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받아들일 때 삶과 생명이 가장 잘 드러난다.

3개월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사람은 그때부터 진정한 하루하루 생명의 소중함을 느낀다. 죽음으로 인해 삶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죽음을 받아들일 때 오히려 죽음은 극복이 된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생 시도조차 해볼 수 없었던 <버킷리스트>의 일들에 비로소 도전해 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우리가 예외 없이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이 무엇인지 ‘존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선사하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경이로운’ 경험이라고 했다.



불안의 극복..


죽음이 이럴진대.. 그보다 한 참 아래인 공포와 불안의 문제는 어떠할까? 삶 가운데 걱정, 근심.. 그로 인한 공포와 불안이 몰려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받아들이면 된다. 수용하면 된다.

불안을 이겨내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이것만이 해법이다.


낯설게만 느껴졌던 그들이 오히려 내 삶의 일부분, 내 삶을 완성시키는 요소 중의 하나였음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밀어내면 적이 되고 끌어안으면 친구가 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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