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e pomme.

by 이동엽


르네 마그리트(1898~1967)가 사과 하나를 달랑 그려놓고 붙인 작품명이다.


그는 이전에도 담배 파이프 하나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이름 지어 놓은 경력이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장난 같지만 여기에는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사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그가 그린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 단지 종이 위의 그림일 뿐이다.

그러니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일 수밖에..


우리는 사과 그림을 보고 사과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사과 한 알을 먹었다’고 말하는 경우에 그것은 사과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지 사과 자체는 아니다.


말이나 그림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지만 말과 그림은 사물 자체가 아니다. 단지 언어라는 도구(tool)를 사용하여 ‘존재’를 표현할 뿐이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구??


언어의 도구적 사용으로 인해.. 정작 그 도구가 가리키고자 하는 ‘존재’가 ‘묻힌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마치 ‘손가락’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저 달 좀 봐라” 했는데 보라는 달은 안 보고 모두들 손가락에 끼워진 금반지만 보더라..” 뭐 이런 말이 하고 싶은 거다.


흠.. 반지를 빼버려??


(오해하지 말자. 언어 자체가 소용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언어가 지니는 한계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늘 도구에 집착하느라 본질을 놓치고 산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한다.

그리고는 나중에 후회한다.


이럴 때면 영화 <곡성>이 생각난다.



존재, 본질, 기본.. 따지고 보면 이는 이 땅의 모든 가르침과 교훈들의 주제이다.


종교적 가르침도 예외일 수 없다. 성경 속에서도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향해 연신 “뭐시 중헌디?”를 외치신다.

도구에,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에, 현혹되지 말고 대신에 그 이면의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쏟으라는 얘기다.


구약의 십계명도 그렇다. 비록 드러난 언어적 표현은..

‘내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마라.. 내 형상을 만들지 마라.. 우상을 섬기지 마라.. ‘ 등이지만


정작 이 계명들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름이나 형상 등의 ‘보여지는 것’들에 매몰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제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면 결국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모세의 형인 아론의 ‘금송아지’처럼 말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십계명)은 10가지나 되지만(실제 유대인은 10 계명을 600여 개의 구체적 계명으로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10 계명은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단 2 가지 계명으로 압축될 수 있고

그 2 계명은 다시 ‘서로 사랑하라’라는 단 하나의 계명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라는 이 한마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 십계명을 주셨는데

정작 유대인들은 그 십계명을 지키느라 '서로 사랑해야 할' 이웃에게 돌을 던졌던 것이다.(아 놔 이거)


계명이라는 ‘언어’ 속에 진리가 묻히는 것이다.

메시지의 본질이 언어라는 도구에 묻힌 것이다.



우리의 눈앞에 ‘사과’ 한 알이 그려져 있지만.. 그것은 사과가 아니다.

사과의 그림일 뿐이다.

사과를 알기 위해선 직접 맛을 보아야 한다.


율법에는 사랑하라는 계명이 써져 있지만.. 계명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개념일 뿐이다.

사랑을 알기 위해선 사랑을 경험해봐야 한다.

직접 실천을 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사과가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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