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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Apr 07. 2021

줏대 없이흔들리는 무리들

부활절에 생각해보는 십자가의 의미

확신이 없는 사람은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확신이란 뚜렷한 앎에 기인합니다. 이 뚜렷한 앎, 깨달음이 없다면 누구든지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상황이 변할 때마다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처형 당시 주위의 사람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앎이 없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깨달음, 이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때 예수님의 열렬한 추종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무리들이 좇아 다녔습니다. 산이든 바닷가든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길에 겉옷을 깔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연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무리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인의 법정에 서게 되자

예수와 바라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빌라도의 요구에 주저 없이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에 열광했던 그 동일한 무리들은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자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 보라"라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줏대 없이 흔들렸습니다.


오늘날 편하게 앉아 성경을 읽는 우리들은 

당시의 무리들을 보며 "어쩌면 저리도 믿음이 없을까" 하고 한심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리들의 흔들림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빌라도 법정의 군중 속 무리 중 하나였다면 과연 어떠했을까?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숱한 기적으로 능력을 과시했던 한 사나이가 초라한 몰골로 끌려 나와 죄수의 신분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한 때 우리는 그에게 열광했습니다. 그동안 그가 보여준 능력이라면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으로부터 어떠한 형태로든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눈먼 자를 고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그의 초인적인 능력이라면 

어쩌면 로마의 압제로부터도 우리 민족을 구해낼 수 있을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게 너무 과한 기대였다면 오병이어의 기적 같은 것으로 최소한 우리의 배고픔의 문제만이라도 해결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날이 갈수록 그를 따르는 무리의 수가 많아졌고 그렇게 수가 늘어날수록 ‘이거 뭔가 이루어지나 보다’ 하는 기대감은 더욱더 커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열렬히 그를 따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온 백성의 기대와 관심을 모았던 그 사나이는 

이제 처참하고도 초라한 모습으로 지금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바보처럼.. 한심하게 로마 사람 빌라도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에잇 이럴 바엔 차라리 힘이라도 센 바라바가 차라리 더 낫지 않겠는가?'

어쩌면 무리들의 선택은 당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무리들의 줏대 없는 흔들림은 하등 이상할 것도..  부자연스러울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예수님에게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온갖 이적과 기사로.. 구원에 관한 달콤한 메시지로..

사람들을 실컷 기대하게 해 놓고 

정작 허무하게..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 없이 

초라한 죄수의 몰골로 사람들 앞에서 빌라도의 판결만을.. 우리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예수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바로 이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를 선택하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도대체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무리들의 반응이  

그들이 처한 상황과 여건, 입장 속에서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었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면

도대체 왜 예수님께서는 그 험한 고통을 무릅쓰시고 십자가를 선택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오늘 날 우리가 십자가 사건을 기리는 모든 것이 무의미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신앙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그저 맹목적인 신앙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 가르침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셔서 3년간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선포였고 곧 복음의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일은 '가르침'을 통해 행해졌습니다 (우리는 이를 예수님의 '말씀 사역'이라고 합니다)


가르침의 여러 방편들 (말씀과 표적)


가르침은 여러 방법들로 행해졌습니다. 우선 말씀으로, 즉 언어로써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일상생활 속의 친근한  비유와 각종 에피소드를 이용하여 군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갖가지 기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치유 사역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적을 통한 이 가르침은 무엇 보다도 놀라운 가르침이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로 수 천 수만 명을 먹이신 기적은 

먹고사는 문제는 사실 별 거 아니라는 메시지였으며..

중풍 병자를 고치거나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나서 냄새가 펄펄 나는 나사로의 시체를 다시 살리신 기적은

죽고 사는 문제(육체적 죽음) 또한 사실 별 거 아니라는 가르침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면 먹고사는 문제나 육체적 죽음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시종일관 언제나.. 일관성 있게 하나님 나라의 선포였습니다

그것은 곧 구원의 선포였고 복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베푸신 온갖 기적은 사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표지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기적을 가리켜 늘 표적, 싸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가르침을, 그 표적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지를 전하려 표적을 행하였는데.. 무리들은 메시지가  아닌 기적에 주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들어 달을 보여주려 하셨는데.. 무리들은 예수님의 손 끝만을 바라보려 했습니다.


이는 비단 무리들 뿐만 아니라 3년 내내 동행했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3년간의 가르침 끝에 이제 예수님께서는 결단을 내리십니다.


지금까지의 가르침을 마무리하고 결론지어 

임팩트 있는 한 방으로 쏟아부어 주실 결단 어린 계획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이야 말로 그동안의 사역을 총정리하는 하나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가르침의 내용은 지금까지 행했던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이번 가르침은 말씀과 이적이 아닌 예수님의 온몸을 던져 행하시는 가르침이라는 점만 빼고는 말입니다.


가르침의 내용.. 


예수님은 시종일관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 즉 우리의 구원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을까요?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예수님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위해" 오셨다고 직접 말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는  감옥에 갇혀있지도, 눈이 멀지도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구원의 필요성도 못 느끼고 구원을 원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구원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을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근원적'인 구원입니다. 배고픔이나 감옥, 질병 등으로부터의 일시적인 놓임이 아닌.. 완전하고도 영원한 구원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단 한 번의 피 뿌림으로 완성되는 영원하고도 완전한 보편적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인간이 가진 모든 고통과 불안 근심 걱정 두려움으로부터의 놓임이요 해방을 의미하는 구원입니다.



두려움과 무지


인간이 가지 모든 고통의 근원은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알지 못함, 즉 무지로부터 옵니다.


사실 기독교는 앎에 대한 종교입니다. 역사상 기독교 진리를 가장 잘 변증 했다고 일컬어지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란 책도 서문에 성경은 단 두 가지 앎에 관한 책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과 인간에 대한 앎(더블 날리지)이 바로 그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영생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 라고 적고 있습니다. 결국 구원은 앎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렇듯 무지로부터의 벗어남이.. 진리를 바로 아는 것이 구원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은 온통 진리에 대한 가르침의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바로 알게 된다면

즉 우리가 진리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 지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깨달음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면

무지는 두려움을 낳습니다. 두려움의 최대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것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고난과 고통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바와 같이 두려움은 무지로부터 나옵니다. (이를 깨닫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잘 아는 것을 두려워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스토리를 이미 알고 있는 공포영화는 더 이상 공포스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깜깜한 어둠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그 어둠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어두움이 익숙한 골목길의 어둠이라거나 혹은 내 방 이불속의 깜깜 함임을 알게 된다면 

그 어둠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포근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모든 초점은 우리의 무지를 깨기 위한 가르침의 사역에 집중되었던 것입니다.

배고픔의 고통과 앞을 못 보는 고통, 중풍 병자의 고통 등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치유 사역의 초점도 결국은 

죽음의 공포를 물리쳐 주시기 위한 가르침의 사역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맹인에게 눈을 뜨게 하여 밝은 세상을 보여주었듯이

영적으로 눈먼 우리에게 깨달음의 눈을 열게 하여 세상의 참된 실상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삶을 누리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서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아무리 말로써, 비유로써, 또는  이적으로써 가르쳐도 

우매한 무리들은 (미련한 우리들은)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마지막 히든카드를 꺼내십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지금까지 말과 표적으로 행했던 가르침을 이제는 예수님의 온몸을 던져 십자가 위에서 행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직접 죽음을 겪으시고 그 죽음을 뚫고 부활하셔서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죽음의 무효함을 몸소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이전부터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삼 일 후 영광스럽게 부활하실 것을 또한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완성입니다.


우리들과 똑같은 인간이신 예수님은 완전한 육체적 죽음으로 들어가셨다가 

3일 뒤에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고 다시 이 땅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자신은 부활의 첫 열매일 뿐이고 자신을 따르는 우리 모두도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실상이라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모세의 인도로 홍해 바닷물로 들어가 마침내 구원을 얻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애굽으로 대변되는 세상으로부터 죽고

하나님 나라로 상징되는 가나안 땅 쪽으로 살아서 걸어 나오는 집단 세례의 경험을 합니다. 

성경은 출애굽 사건을 우리의 구원 사건의 모형으로 제시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몰랐을 때는, 무지하였을 때는, 확신이 없었을 때에는 두려워했고 줏대 없이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로부터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목도한 증인들은 이제 달라졌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을 목도한 그들은 이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하였습니다. 

실제로 제자 베드로는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너도 그 무리들과 한 패가 아니냐"는 여종의 추궁에 두려워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자신을 숨기기는커녕 큰 소리로 군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증거 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극심한 박해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벌벌 떨며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찬송을 부르며 화형대에, 굶주린 사자 떼 앞에 섰습니다.


한낱 유흥거리로.. 그들의 처절한 비명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과 사자들에게 쫓기는 모습을 즐기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사자굴에 던져 넣었던 로마 황제는 

오히려.. 죽음 앞에선 그들의 의연함과 초연함..  울려 퍼지는 그들의 찬송 소리에 오히려 자신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아니 감당할 수 조차도 없는.. 진리를 깨달은 자들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된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심과 부활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20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에게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오늘날 십자가와 부활을 기리는 이유는 명백해졌습니다.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일입니다. 십자가로 완성된 그날의 가르침을 오늘날 다시금 생생하게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가르침을 마음에 다시금 새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인 존재들이며 하나님 안에서 한 몸으로 연결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 된 교회, 한 몸을 이룬 교회의 지체들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뿐만이 아니라 영원을 함께하는 한 몸, 한 지체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고 

가장 작은 자에게 한 일이 곧 예수님에게 한 일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 몸 대하듯 남을 대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달은 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깨달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아직 깨달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깨달은 자는 반드시 감사하게 되어있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무지하였기 때문에,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줏대 없이 흔들렸다면

십자가를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된 우리는 더 이상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무지함으로 인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힘들어했다면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한 몸임을 깨달은 우리는 

이웃 사랑하는 일이 마치 내 몸 움직이듯 자연스러운 일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황금률이 왜 최고의 법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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