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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Apr 15. 2021

이기주의자가 구원 받는 방법

에고의 재발견

우리가 그동안 에고를 너무나 오해하였다. 너무 나쁜 애 취급하였다


흔히들 에고는 나쁜 것의 대명사쯤으로 생각한다. 이기주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아도 된다는 못된 사고의 중심에는 항상 강한 에고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에고의 모습은 생명이 지니는 하나의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생명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신성의 한 측면일 뿐이다.


따라서 에고가 생명을 존속시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하등 잘못된 일도 지탄받을 일도 아니다.


비 온뒤 길가에 나온 지렁이는 햇볕에 말라죽기 전에 다시 땅 속으로 기어 들어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꿈틀거린다.


길 가에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아름답게 바라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징그럽게 여기거나 혹은 밟아 죽이려 할 것이다. 인간의 눈에 징그러운 것은 곧 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징그럽다고 밟아 죽이려 하는 지렁이는 틀림없는 하나의'생명'이다.


모든 생명은 존귀하다. 그리고 그 본성에 있어서 '존재'하고자 한다.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존재하고자 하는 모든 생명의 꿈틀댐(몸부림)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싱그러운 아침에 벌레를 찾아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나 도토리 한 톨을 오물오물 갉아먹는 다람쥐의 귀여움은 본질에 있어서 지렁이의 꿈틀거림과 전혀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엄마의 품 안에서 젖을 빠는 아기의 행복한 입술이나 짐승의 내장을 뜯는 맹수의 피 묻은 입도 그 본질상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은 젖을 빠는 아기의 입술과 피 묻은 사자의 이빨을 도저히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


그러나 조금만 냉철히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우리의 머릿속에 천사의 이미지로 각인되어있는 아기야 말로 완전무결한 에고의 덩어리이다. 자신의 배고픔을 위해서라면 죽어가는 어미의 젖을 빨아 댈 수도 있는 존재가 바로 아기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에고는 그 탐욕에 있어서 끝이 없다. 에고는 본성상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 자신의 존재 유지를 위해 부족한 것은 채워져야만 하고  설령 다 채워졌다 할지라도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쌓아두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타자를 위한 배려는.. 에고에게는 낄 틈이 없다. 에고에게는 '배려'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에고의 이러한 이기주의적 본성을 돌이키게 할 수 있는 그 어떠한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에고가 타자를 배려하도록 만드는 것은 호랑이를 가르쳐 풀을 뜯어먹게 만들려는 시도와 같다.  이기주의는 에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성적으로 에고 덩어리로 태어난 우리는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어쩌면 성경에서 말하는 원죄는 어찌할 수 없는 우리의 에고를 말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게 된 인간은 드디어 이원성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이원성의 세계는 나와 남을 구별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남에 대하여 자신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된다. 선과 악이라는 것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이원성을 전제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벌거벗은 것이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남'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이 밝아진' 이 후로는 벗은 몸이 부끄러워진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게 된다. 남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그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아담에게 하와는 자신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었기 때문이다. 한 몸이 누구한테 부끄러움을 느낀 단 말인가?


한 번 생각해 보자. 스스로 판단한 선이 과연 진정한 선일 수 있을 까? 벗고 있는 것이 악한 것이라는 생각은 과연 누구의 판단일까? 옷을 입는 것은 당연하고 공공장소에서 옷을 벗는 것이 처벌받을 수 있는 범죄라는 사실은 과연 누구의 판단일까?


나에게 선한 것이 타인에게는 악이 될 수 있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우리에게 의인이었던 안중근 의사는 일본 사람들에게는 테러리스트였고

그들에게 영웅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에게는 한낱 정복욕에 불타오른 막부의 수장일 뿐이다. 같은 논리로 아마존 원주민에게는 한 여름에도 넥타이를 매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 도저히 이해 안 갈 것이다.


즉 인간은 보편적 선을 생각할 수도.. 행할 수 도 없다. 우리가 스스로 선과 악의 판단자가 되었을 때 그  결과는 언제나 '대결'과 '분리'였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그 결과는 언제나 폭력이다.


결국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는... 바꿔 말해서 '에고 덩어리'로 태어난 우리는 '죄악 덩어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났는 걸..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셨다. 남에 대한 배려와 사랑, 즉 '이타주의'가 복음의 핵심 메시지였던 것이다. 선한 행위가 우리의 구원의 직접적 전제 조건은 아니지만 이기주의가 아닌 이타주의적 마음 가짐은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였던 것이다.


그러나 비극은 태생적으로 '에고 덩어리'로 태어난 우리는 애당초 구원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는 사실이다.

결국 삶 가운데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악의 문제, 고통의 근저에는 이렇듯 태어날 때부터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존재의 비극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악의 문제는 우리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악은 스스로가 판단의 주체가 될 때 발생되는 그 무엇이다. 바꿔 말하면 '나'를 남과 분리시켜 타인을 '나'라는 존재를 위한 수단으로 '도구화' 시킴으로써 규정되는 그 무엇인 것이다. 즉 이기주의(자기 중심주의)가 악의 근원인 것이다. 스스로 선과 악의 판단 주체가 된 것이 악의 근원인 것이다.


문제가 파악되면 답은 쉬어진다. 악이 무엇인지 파악되면 악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의 해결도 실마리가 보인다.


나와 남을 분리하여 남을 나의 존재 유지를 위한 대상이요 수단으로 인식하는 이기주의적 태도가 곧 악의 실체였다면... 반대로 나와 남을 하나로 인식하고 이웃을(남을) 내 몸 사랑하듯 사랑하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선포하신 메시지와 동일하다.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우리에게 구원을 위한 가르침을 펼치셨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시고 다시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 가르침이 바로 '복음'이다. 기쁜 소식이다.

우리의 구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시고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 메시지의 핵심에는 언제나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그저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다. 황금률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이다. 나와 남을 다르게 여기지 말라는 소리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또한 원수라는 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결코 '이 악물고' 원수를 사랑하란 소리가 아닌 것이다.

결국 이기주의의 극복이 구원 메시지의 핵심인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은 태생적으로 이기주의자이다. 자신의 손톱에 박힌 가시가 남의 몸에 박힌 총알보다도 더 아픈 게 당연한 존재이다.

이렇듯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이 과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단 말인가?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 모두는 아담의 허리에서 나온 한 몸, 한 가족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흉악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가족은 사랑한다. 한 몸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혈육은 이기적 인간이 유일하게 아픔을 동감하는 '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은 동일한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모든 사람이 한 몸,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교회에 처음 가면 가장 어색한 것 중에 하나가 모두들 서로를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생면 부지의 사람이 들어와도 무조건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가 본질상 가족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면 형제, 자매라는 호칭은 사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에고를 너무 나쁜 애 취급하였다. 이기주의의 원천으로 여겼고 그리하여 악의 근본으로 여겼다.

그러나 에고의 범위를 넓혀 내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를 나의 가족으로 여기게 된다면 어떠할까?

아니 내가 속한 공동체를 넘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전체를 나의 가족, 나와 한 몸으로 여기게 된다면 어찌 될까?


우리가 형제자매를 기꺼이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랑스러워서 라기보다는

그들이 곧..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이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이 자신의 생명을 내걸 만큼 소중히 여기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도 그들이 사랑스러워서 라기보다는

그들이..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실 만큼 사랑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한 진지한 깨달음이

태생적 이기주의자인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다.


태생적 이기주의자인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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