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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May 12. 2021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이 돼?

70 X 7 = 490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평소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시는 예수께 제자들은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상대를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는다.  용서를 하더라도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다. 


이때 예수께서 하신 답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용서하라"였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은 490번이다


젠장.. 


한 사람을 7번 용서하는 것도 힘든 마당에 70번씩 7번 이라니.. 이게 말이야? 된장이야?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과연 490번 씩이나 용서할 대상을 만나기라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제자들은 속으로 이렇게 불만을 토해내지 않았을까? 


그러나 평소 깊은 가르침을 펼치시는 예수께서 아무 생각 없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답을 하실리는 없다. 그렇다면 이 말에는 뭔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용서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껏 용서란 내가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니 490번 씩이나 남을 용서할 생각에 정신부터 혼미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란 누가 누구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숫자 또한 애당초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숫자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니 이는 처음부터 용서란 누가 누구에게 베푸는 행위가 될 수 없음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생각하는 용서란 과연 어떤 개념일까? 


< 일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 >


예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란 말에 벙쩌하는 제자들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하신 듯 

곧이어 일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를 들어 용서의 개념을 설명하신다. 이 비유에는 10,000 달란트 빚진 자와 그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자가 등장한다.

참고로 1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고, 1 데나리온은 당시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10,000 달란트는 (하루 품삯을 10 만원씩만 쳐도) 약 6조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6,000 데나리온 x 10,000 X 10만 원)

비유 속에서 어떤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게 그 몸과 처와 자식을 다 팔아 빚을 갚게 하라 명한다. 

그 빚진 자가 엎드려 용서를 비니 주인이 불쌍히 여겨 10,000 달란트의 빚을 모두 탕감해 준다.


탕감받은 자가 이번에는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는데 그에게 빚을 갚으라 독촉한다.  

그가 못 갚자 그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은 10,000 달란트 탕감받은 자에게 노하여 그를 꾸짖고 그 빚을 다시 다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는 스토리다.

그리고 말미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말씀으로 용서에 대한 비유를 마치신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이며 또한 충분히 이해되는 스토리다. 

세상에나.. 자기는 6조 원 대의 빚을 탕감받았는데 겨우 자신에게 천만 원(십만 원 X100)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다니.. 이런 괘씸한 자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정의로운 주먹을 불끈 쥘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자.

과연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자신에게 100 데나라 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그토록 못된 사람이었기에 그랬던 것일까? 그렇게 성급히 결론짓기에는 예수님의 비유는 그리 단순한 스토리는 아닌 것 같다.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야기 속에서

10,000 달란트의 빚을 진 종은 그 빚을 갚으라는 주인의 말에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마태복음 18:26)"라고 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10,000 달란트는 6조 원의 돈으로써 애당초 갚을 수 있는 액수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빚진 사람은 이 금액을 갚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 사람은 이번에는 자신에게 천만 원 빚진 사람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그렇다면 혹시 이 사람은 자신이 탕감받은 10,000 달란트의 빚이 과연 얼마만큼의 액수인지를 아예 가늠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도 6조 원의 돈이 과연 얼마만큼의 돈이지 체감할 수 없다. 6조 원이 아니라 그의 60분의 일인 1000억 원이라도 우리는 그 돈으로 양념치킨을 몇 마리나 주문할 수 있는지.. 떡볶이를 몇 인분이나 사 먹을 수 있는지 도무지 계산이 안된다. 어차피 체감할 수 없는 돈이라면 1000억이나 6조나 매 한 가지일 뿐이다. 


그러나 100 데나리온, 즉 천만 원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천만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양념 치킨, 순살 치킨, 간장 마늘 치킨 중에서 어느 것을 시킬지 고민하지 않고도 매일매일 일 년 내내 사 먹을 수 있는 돈이다.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금액이다. 


만일 이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자신이 진 빚이 과연 얼마만큼의 금액인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 말은 곧 자신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자신이 빚을 탕감받은 것이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6조 원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헤어 나올 없는 수렁에 빠졌다는 것을 뜻한다. 수 천 번 죽었다 깨나도 갚을 수 없는 금액이라는 소리다. 자신의 몸을 팔고 처 자식까지 몽땅 팔아도 갚을 수 없는 금액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지금 그의 상황이 죽음보다도 수천 배 더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자신이 처한 이러한 상황을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참아 달라 그럼 빚을 갚겠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자의 목을 조르며 빚을 갚으라 독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이유가 설명된다. 



예수께서 지금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우리가 받은 용서가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깨달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는데 감사하게도 다시 한번 새롭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음을 깨달았다면 

이제부터 그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다. 


모든 것이 리셋되어 갚을 돈도 없어지게 된 것처럼 자신이 독촉할 수 있는 채권도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 그는 누구를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저 감사할 뿐인 것이다.


이것이 용서의 핵심이다.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아니라 일백 번씩 만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냥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 말이다.


용서의 핵심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데 있다. 


자신이 일만 달란트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자였음을 깨닫는다면 

용서는 나의 의지를 거스르는 힘든 행위가 아니라

숨 쉬듯 자연스러운 반응이 될 것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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