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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Jun 02. 2021

씨 뿌리는자 비유는 뭘 말하고자 하는 걸까?

길가, 돌밭, 가시밭, 30배 60배 100배...

청중들이 모이자 예수는 다짜고짜 "씨 뿌리는 사람이 나가서 씨를 뿌리는 데.."라는 말로 운을 뗀다.


내용은 간단하다. 뿌려진 씨가 길 가나 돌밭이나. 가시밭에 떨어지면 결실하지 못하고 말라죽고.. 좋은 밭에 떨어지면 뿌리를 내려 30배 60배 100배로 결실을 맺게 된다는 내용이다.   


..... 허무하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께 묻는다. "그게 뭥미??"


예수께서는 자못 진지하시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아무한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비유의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신다.


"천국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각기 길가, 돌밭, 가시밭으로 상징되는 세상 속의 걱정, 염려, 불안등의 집착하는 마음에 기인한다." 


그러니 이러한 욕심과 집착을 떨쳐내면(좋은 마음 밭을 일구면) 

풍성한 열매, 즉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는 '깨달음'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에 관한 깨달음이냐? 하는 것이다. 

한 가지 유추해 보자면 답변 중에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천국에 관한 깨달음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여기서 '천국 말씀'으로 번역된 이 말은 원래 '(하늘) 나라의 말씀' 이다. 

'나라'는 바실레이아가 번역된 것이고 

'말씀'은 로고스가 번역된 것이다. 


로고스라는 말은 근본적으로는 만물의 원리, 정신, 이성이란 뜻이고, 

나라로 번역된 바실레이아는 오늘날처럼 국경선이 그어진 국가의 개념보다는 

왕(통치자)의 명령(뜻)이 적용되는 범위라는 개념에 가깝다.

그렇다면 '천국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근본 원리라는 소리가 된다. 


지금 예수는 이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데 이 깨달음은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밭, 다시 말해서 마음 밭이 잘 가꾸어진 사람, 세상의 걱정, 염려, 불안 등 집착에서 벗어난 청결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허락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일게다.


계속해서 예수는 모두가 궁금하게 여기는 천국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간다. 

그런데 천국에 대한 설명이 좀 이상하다. 

여러 가지 구체적 예를 들어 천국을 설명하지만 하나같이 앞뒤가 안 맞는 모순된 설명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예수는 천국을 설명하며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 같으니"라고 말씀하신다. 즉 '천국=사람'으로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말씀하신다. 이번에는 '천국=씨앗'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동일한 천국 개념이 어떻게 정반대로 비유될 수 있단 말인가? '씨를 뿌린 사람'과 '뿌려진 씨'가 어떻게 동일하게 천국에 대한 비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뭔가 이상하다. 예수께서 뭘 착각하신 걸까? 아니면 기록자의 실수일까? 전지전능한 신인 예수께서 무엇을 착각할 리 만무하고 또한 기록자의 착각이나 실수로 볼 수도 없는 것이.. 이어지는 설명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나오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예수는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하며 '천국=보화'로 비유하신다. 그리고 곧이어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라고 하며 '천국=진주 장사'로 비유하는 것이다. 동일한 천국이 정반대로 '보물'과 그 보물을 구하는 '장사'로 비유된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한 번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글을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 나오게 되면 취하게 되는 한 가지 국률이 있다. 바로 맥락을 살피는 것이다. 만일 어느 한 구절이 이해가 안 되면 그 구절이 속한 문장이나 문단을 살핀다. 그 속에서 구절의 맥락을 살피는 것이다. 만일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면 이번에는 그 문장이나 문단이 속한 챞터, 장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를 한 번 떠 올려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 장 속에 배열된 문단과 문장과 구절들은 그 장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면 그 구절, 문장은 그 장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와는 별 연관성이 없는 구절일 가능성이 높다.  즉 이해하지 못해도 별 상관없는 구절이니 그냥 넘어가도 된다는 말이다.


가끔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이해하기 힘든 구절(난해 구절) 또한 마찬가지이다. 난해 구절의 이해를 위해서는 그 구절이 속한 문단, 장, 책 등의 순서로 맥락의 범위를 넓혀가며 성경 전체의 주제와 연관시켜 이해하려는 습관이 중요하다. 


성경 전체의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특히나 신약 성경의 주제는 하나 됨을 통한 이웃사랑이다. 사랑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통해 하나 된 존재임을 깨달은 후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최고의 가르침이라 일컬어지는 황금률(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또한 남을 나와는 구별된 객체적 대상으로 보지 말고 나와 한 몸을 이룬 유기체적 공동체의 일부로 보라는 이웃사랑의 가르침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는 바울의 '지체 의식(한 몸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교회에 처음가 본 사람을 가장 어색하게 만드는 것들 중 하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모습이라든지.. 혹은 서로를 '형제님' '자매님'하며 호칭하는 때일 것이다. 왜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을 형제자매라 부르는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 부르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을 깨닫고 나면 쉽게 납득이 된다. 

'아버지' 혹은 '형제자매'등의 호칭이야말로 우리가 한 몸이며 한 지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예수가 강조한 사랑은 가슴 뜨거운 원초적, 감정적 사랑이 아니었다. 예수가 강조한 이웃 사랑은 우리가 한 몸에서 비롯된 '하나'라는 인식과 깨달음에서 나오는 지극히 이성적 사랑을 말한다. 


결국 우리 모두는 하나로 연결된 지체들로서 '인류'라는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깨달음이 성경 속 모든 가르침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 속 모든 가르침은 이러한 성경의 가장 큰 맥락에 비추어 그 뜻을 살펴야 한다. 씨 뿌리는 자 비유 또한 이러한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다. 


만일 맥락을 떠나 비유를 살펴본다면 동일한 천국을 '감추인 보화'로 비유했다가 곧바로 '그 보화를 찾는 사람'으로 비유하는 것이 모순되고 잘못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성경 전체적으로 '하나'와 '한 몸'을 강조한다는 것을 깨닫는 다면 

오히려 천국을 이처럼 '주체와 객체를 아우르는 '하나' 된 어떤 것'으로 비유하는 예수의 말씀이  

더 깊고 설득력 있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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