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엽 Oct 23. 2021

차마 어디가서 말 못할 사연

부적 잃어버린 후 목사된 이야기...

나는 본래 무신론자였다

적어도 대학교 2학년 군대 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는 87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당시의 대학 캠퍼스는 최루탄과 지랄탄이 수시로 날아드는 곳이었다

그러나 나는 독재타도를 외치며 민주화를 열망하던 운동권 학생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저 미팅 나가서 예쁜 여학생에게 애프터 신청할 궁리나 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은 캠퍼스는 작았지만 건물들이 오래전에 지어진 건물답지 않게 천정부터 창문이 크게 달려있어서 실내가 늘 밝고 쾌적했다. 우스개 소리로 60년대 학교 본관이 처음 지어진 당시에는 화장실이 너무도 밝고 깨끗해서 학생들이  도시락을 까먹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이러한 건물 스타일은 학생 회관에도 적용되어 평소 식사시간 외에도 학생들은 창가 테이블에서 과제도 하며 담소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 또한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학생회관에서 평소 눈여겨보던 여학생 근처에 자리를 잡고 분위기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한 번은 학생회관에서 공부하던 중 화장실에 간 적이 있었다. 화장실 또한 천정부터 내려오는 창문으로 인해 밝고 쾌적했는데 그날은 그 창문으로 난데없이 데모 진압용 지랄탄이 날아들어 왔다. 이건 정말 실화다. 지랄탄은 최루탄과는 차원이 다르다. 최루탄 가루 속에 눈 껌벅이며 버텼다는 전설적인 사람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어도 지랄탄 연기를 버텼다는 사람은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

그 지랄탄이 엉덩이 까고 일 보고 있는 1인용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아물거리는 정신줄을 끝까지 놓지 않고 초인적 정신력으로 기절하지 않았던 단 한 가지 이유는... 엉덩이 깐 채로 화장실 바닥에 기절하여 내가 평소에 눈여겨보던 여학생 앞에 발견될 가능성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 학생운동과 나와의 관계는 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런데 1학년 과대표 선출 모임 때에 친구가 장난 삼아 나를 후보로 추천한 것이 문제였다

초중고 다닐 동안 반장 한번 못해본 나는 과대표가 대학교의 반장인 줄 알았다

과대표라는 명예욕에 눈이 먼 나는 뽑아주면 열심히 하겠다는 등의 감당하지 못할 망언을 마구 날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간발의 표차로 1학년 과대표라는 명예(?)를 거머쥐었다

이제부터는 학과를 대표해서 당당하게 여자 대학교에 방문해서 미팅도 주선하고 그야말로 대학 생활의 낭만을 제대로 누려 불 꿈에 젖었다


그러나 나만의 헛된 꿈이었다

과대표로 선출된 직후부터 나는 총학생회 멤버로 등재되었다

본의 아니게 수업 대신 총학생회 미팅에 참석해야 했고

본의 아니게 수업거부를 주도해야 했으며

본의 아니게 전방입소(대학생 군대 체험)를 거부해야 했다


2학년을 마치고 나니 군대 영장이 날아왔다

당시 정부에서 운동권 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영장을 발부하고 그렇게 입대한 학생들은 군대에서 개 고생 시킨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나는 무서웠다 군대 가기 싫었다

그러나 빽도 없고 돈도 없는 나로서는 군대를 피할 길이 없었다


입대를 앞두고 두려움에 떠는 나에게 엄마는 부적을 하나 마련해 주었다

가난한 살림에 엄마에게는 거금을 들여 용한 무당을 찾아가 부적을 산 것이었다

지니고 있으면 군생활 내내 사고 없이 무사히 제대할 수 있다는 부적이란다


뭐 이딴 미신을 믿느냐며 엄마에게 싫은 소릴 했지만 내심 위안이 되었다

그 부적을 가슴에 소중히 안고 입영버스에 몸을 실었다


춘천 102 보충대에서의 6주 군사훈련은 혹독했다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 마치 나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던 것처럼 보였던 조교나 교관들이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았던 병사들이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보니 새삼 신기하만 하다


6주간의 기초 군사 훈련 중 4주까지의 훈련을 마치고 나서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가 기거하던 숙소가 예비군 동원훈련에 쓰인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와 보니 연병장에 텐트가 쳐있고 이제부터는 텐트에서 생활해야 한다고 한다

조금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와 그럼 이제부터는 그 엄한 저녁 점호는 수월하게 넘어가겠구나" 하고 모두들 좋아라 했다

나 또한 덩달아 좋아했지만 어디 한구석에서 찜찜한 기분이 올라오는데 그게 뭔지는 몰랐다

그러다가 아차 하고 깨닫게 되기까지는 몇 분 안 걸렸다

숙소의 개인 관물대 속에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부적이 생각났던 것이다


 아차 소중한 내 부적!


우리가 야외에서 훈련받는 사이에 숙소를 옮기는 작업은 보충대 병사들이 했단다

그들이 훈련병들의 개인 소지품들을 소중히 다루어 줄 리 만무했다


텐트와 숙소 관물대를 몇 번이고 오가며 뒤져도 부적은 보이지 않았다

3년간의 군 생활을 지켜줄 소중한 부적을 입대 4주 만에 훈련소에서 잃어버린 것이다

가난한 살림에 울 엄마가 힘들여 마련해준 부적을 잃어버린 것이다


순간 잊었던 두려움이 다시 나를 엄습했다

교관들의 눈빛이 더욱 매섭게 느껴졌고 앞으로의 군대 생활을 어떻게 해 나갈 수 있을지 캄캄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5주 차를 그야말로 넋이 나간 사람 보냈던 것 같다


훈련소에서 몇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바로 식사시간과 종교활동 시간이다

아무리 혹독한 훈련 기간일지라도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준다

그러나 속옷 빨래 등 그나마 쉬면서 개인정비를 할 수 있는 소중한 주말 시간을 종교 행사 참석에 투자할 만큼의 진지한 골수 신앙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비록 예수님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르는 무신론자였지만 부적을 잃어버린 당시로서는

구원의 주님을 애타게 찾는 골수 신자와 별로 다를 바 없는 '길 잃은 어린양'이었다


나를 포함한 종교 행사 참석자들은 대략 10명 정도였다. 부대 내에 병사들을 위한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 계신 목사님을 군목이라 한단다. 어찌 되었건 나는 빨리 하나님을 만나 뵙고 싶었다. 암만 생각해도 부적 써 준 무당보다는 하나님이 더 쎌 것 같았다.  이참에 부적을 믿었던 마음으로 하나님을 열씸히 믿어서 군생활을 버텨보려 했던 마음이 컸던 것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교회엔 목사님이 없었다.  아 부적이 나를 버리더니 이제는 하나님마저도 나를 외면하는구나.. 하며 절망하고 있을 때에 병사들 중 누군가 한 명이 우리끼리라도 예배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는 둘러앉아 함께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누구라도 한 번쯤은 들어 본 적 있는 친숙한 찬송가였다.


찬송을 하며 십여 명의 어린 양들은 펑펑 울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 찬송 몇 곡 부르고 교회 문을 나서는데 온 세상이 바뀐 것 같았다. 분명 같은 길인데 올 때와는 달리 하늘은 맑았으며 나무는 푸르렀고 새들은 즐겁게 노래했다. 두려웠던 마음은 온 데 간데 없어지고 마음이 너무나 평온했다. 그날 이후 나는 자발적인 기독교인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허탈한 신앙인이 된 동기다.


남들은 신앙을 가지게 된 동기를 감동적으로 간증하며 다닌 다던데 목사가 된 나는 신앙을 가지게 된 동기를 어디 가서 말도 못 한다. 차마 부적 잃어버리고 군 생활 두려워서 하나님 찾게 되었다고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