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말이 안 된다
춘천 102 보충대 신병 훈련 6주 차에 기독교인이 된 나는 앞으로 남은 군생활을 하게 될 부대에 배치받게 되었다. 비록 부적은 잃어버렸지만 훈련소 교회에서의 강렬했던 경험 덕분에 나는 신앙적으로 뜨거워 있었다.
보통 신병이 부대에 배치받게 되면 몇 주 동안 그야말로 선임들의 장난감 신세가 된다. 제아무리 사회에 있을 때 잘 나갔다 하더라도 일단 이등병 계급장 달고 내무반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어리바리가 되는 것이다. 춤추라면 춤추어야 하고 노래 부르라 하면 노래 불러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왠지 나는 신병답지 않게 늘 평안했다. 신앙심이 생긴 것이다. 마침 부대의 최상급자인 대대장님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신병인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는 바로 위 선임이 신학생이었다. 이건 뭐 하나님이 줄곧 나를 따라다니시면서 돌봐 주시는 것 같았다.
나의 신앙은 군대에서 무럭무럭 자라나 마침내는 부대 내 교회에서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참고로 '세례'는 신자 됨의 공적인 인증과도 같은 것이다.
부적 들고 입대한 무신론자가 세례교인이 된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은 날로 커져만 갔다. 엄마의 죽음 소식을 전해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병사들에게 1년에 한 번 정기 휴가가 허락된다. 군인에게 첫 휴가는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이다. 생각해 보라. 피가 끓는 젊은 나이에 사회와 동떨어진 산속에서 칙칙한 국방색과 시커먼 사내들 얼굴만 보고 지내다 꼬박 1년 만에 화려한 도심으로 휴가 나오는 기분을 말이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90년도만 해도 군인들이 한 번 휴가를 나가기 위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가를 일반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밋밋한 군복 등 쪽을 조금이라도 멋있게 보이기 위해 조선시대 인두 같은 조잡한 다리미로 얼마나 애를 쓰는지(주름의 간격을 맞추기 위해 자로 잰다) 혹은 아무도 봐주지 않을 군화에 광을 내기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는지(선임들이 군화에 물광, 불광을 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평범해 보이는 휴가 나온 군인들의 모습은 실제로는 결코 평범할 수 없는 과정을 걸쳐야만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군인들은 보통 휴가 나가기 수 주일 전부터 손꼽아 그날을 기다린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휴가 나가서 할 일들의 목록들을 머릿속에 정리하며 행복해한다. 먹고 싶은 음식 목록, 보고 싶은 영화 목록, 만나고 싶은 친구 명단을 상상하며 행복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상상을 더욱더 즐겁게 만드는 것은 매일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엄마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 휴가 나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휴가를 나오면 그 순간부터 시간은 초광속으로 흐른다. 해야 할 일 목록의 반도 못 끝냈는데 벌써 귀대 날짜가 다가오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의 첫 휴가도 그랬다. 아침부터 친구들과 어울리고 자정이 넘어서야 술에 떡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늘 그때까지 주무시지 않고 기다렸다가 잠자리를 챙겨 주셨다. 며칠 그러다 보니 아직 얼굴 못 본 친구들이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새 복귀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휴가 나온 후 처음으로 엄마와 밥상을 같이 하면서 괜스레 미안했다. 처음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엄마랑 마음껏 대화도 하고 함께 외식도 하려고 했는데 벌써 내일 복귀라니.. 나도 서운했지만 엄마 또한 여간 서운한 눈치가 아니셨다. 그러나 엄마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아들을 위해 서운한 눈치 안보 일려 애쓰시며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곧 제대하는데 뭘.. 하셨다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애써 접어두고 다음번 휴가를 기약하며 엄마와 이별했다. 그게 바로 1주일 전이었다. 그런데 그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져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약간 말을 더듬던 소대장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듣던 당시 나는 부대원들과 웃고 떠들고 있었다. 처음엔 무슨 소린가 이해가 안 되었다가 소식의 내용이 이해되는 순간 나는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았다. 그야말로 악!이라는 외마디 소리 밖에는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늘이 노래졌다. 정말로.
사실 그다음부터는 별 기억이 없다. 그저 머릿속이 텅 비고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니.. 바로 며칠 전에 뵈었는데..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우리 아들 제대한다고 기뻐하셨는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휴가 기간 내내 술쳐먹느라 엄마와 이야기 한 번 제대로 나눠 보지 못한 나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엄마한테 너무 미안했다. 갑자기 살기가 싫어졌다.
장례식을 위한 휴가를 나서면서 이번에 부대를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엄마가 계신 곳으로 나도 가리라 결심했다. 관물대 속에 휴대용 라디오가 보였다. 군대에서 귀한 물건이었지만 옆에 있던 동료에게 주었다.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읍내로 들어서자 우선 약국부터 찾았다. 수면제를 사기 위해서였다. 네다섯 군데 돌면 충분한 양의 수면제를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약국이 많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하면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원도 산골 전방부대에서 서울까지는 무척이나 먼길이었다. 날이 어둑해져서야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앞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부대를 떠나기 전 동료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종종 잘못된 소식이 전해질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자신도 얼마 전에 아버님의 부고 소식을 듣고 휴가를 나왔었는데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어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내용이 잘못 전해졌다는 것이다. 산속 부대의 통신 사정이 별로 안 좋아서 종종 그런 경우가 생기니 읍내 나가면 먼저 집에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해보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전화 걸어 확인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집 앞까지 도착한 것이다.
정말 돌아가셨으면 어떡하지. 그러면 나도 따라 죽어야지. 아니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을 이렇게 허무하게 데려가실리 없어. 그래 맞아. 나에겐 하나님이 있었지. 나를 늘 보살펴주시던 좋으신 하나님. 신앙심이 되살아 나자 힘이 솟았다. 하나님 울 엄마 아직 안 죽었죠? 엄마가 위독하시다면 살려주세요.
엄마만 살려주시면 하나님이 하라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할게요.
그러고 나서 나는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왠지 마음속에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내 입에서 주기도문이 끊기지 않으면 하나님이 엄마를 살려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아파트 단지 정문까지의 몇 백 미터를 마치 미친놈처럼 주기도문을 중얼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행여 기도가 끊길까 봐 온 신경이 곤두섰다. 그렇게 주기도문을 중얼거리며 아파트 정문에 들어섰을 때 나는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저 멀리 우리 아파트 동 입구에 상갓집 등이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내 시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집에 가까이 오자 상갓집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 아이고 저걸 어째 아들이 도착한 모양이여.. 드디어 상주가 왔네". 그들의 모습과 목소리는 마치 슬로 모션 영화처럼 천천히 웅얼거리는 모습과 소리로 느껴졌다. 올라가 보니 소복을 차려입은 누님들이 흐느껴 울고 있었다. 엄마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죽음인지라 제대로 된 초상화를 준비하지 못해서인지 주민등록증 사진을 확대해 놓은 초상화였다. 순간 나는 생각했다. 개뿔 하나님은 무슨 얼어 죽을.. 아무 이유 없이 착한 우리 엄마 데려가는 그딴 하나님 이제 난 안 믿어!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나는 삶과 죽음의 의미가 더욱 궁금해졌다. 도대체 왜 사는가? 도대체 왜 죽는가? 죽음 이후엔 무엇이 있는가? 수면제를 구입하는데 실패해서 죽음 이후에 대해 직접 살펴볼 기회도 놓쳤다. 부대에 복귀하니 그동안 나를 신앙으로 이끌어주었던 신학생 선임이며 친하게 지내던 군종병(군대에서 종교 관련 보직을 맡은 병사)이 여러모로 나를 위로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한번 신앙이 식어버린 나는 그들을 차갑게 외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고마웠던 것이 당시의 그들이 나를 위해 흔하디 흔한 하나님의 섭리 운운하며 섣불리 위로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만 먼 발치에서 그저 나를 따뜻하게 대할 뿐이었다. 애써 외면하며 모른 척하는 나를 위해 관물대 속에 초코파이를 넣어둔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군인에겐 역시 초코파이지..)
아무리 신학생이고 군종병이라 할지라도 군대에서 선임이 졸병에게 그렇게 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하튼 그들의 지혜로운 노력으로 차츰 나는 마음을 돌이켜 다시금 군대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되살아난 신앙 덕분에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도 많은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다. 육체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실제적인 깨우침 말이다. 전에는 성경 속의 천국이란 개념이 그저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막연하게 이해되었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동안 피상적이고 문자적으로만 알았던 천국(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보다 실제적인 인식과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이제 천국은 나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엄마가 계신 실제적인 곳이 되었으니 말이다. 다만 한 가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것은 엄마가 살아생전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교리에 따르면 교회 안 나가던 사람은 죽은 후에 지옥에 간다던데 그럼 우리 엄마가 지옥에? 그건 암만 생각해도 말이 안 되었다. 지옥은 나쁜 놈들이나 가는 곳이지 울 엄마처럼 평생을 선하게 살아오신 분이 지옥에 간다면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