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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Oct 23. 2021

차도녀 광고팀 대리와의 결혼

어느덧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이 되었다. 사회에 나가면 뭐부터 해야 하나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는데 몇 개월 전에 먼저 제대한 신학생 선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제대하면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출석하자는 것이었다. 마침 제대 후 다닐 교회도 없었고 신뢰하던 선임이었으니 흔쾌히 승낙했다. 


제대하자마자 나는 바쁘게 지냈다. 1월에 제대했는데 3월에 학교에 복학했고 그 사이 2달 동안에는 서울역 앞 대우빌딩 지하의 아메리카나라는 햄버거 집에서 알바를 했다. 집에 있으면 엄마 생각나서 서글퍼지니 최대한 바쁘게 밖으로만 돌아다녔다. 군대 선임이 소개해준 교회는 개봉동에 있었는데 아담한 사이즈의 동네 교회였다. 나는 청년부에 소속되었는데 사람들은 모두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온 탓인지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금방 그들과 친하게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MBC 문화 방송


학교에 복학해보니 학생운동도 잦아들어있었고 모두들 취업준비를 하느라 열심이었다. 당시에는 방송사나 언론사 입시가 치열했는데 '언론 고시'라 불리며 그 열기가 대단했다. 요즘 한류가 뜨는 이유 중에 하나가 당시에 뛰어난 인재들이 방송계에 많이 진출했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나 또한 신문방송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했기에 방송사 PD직을 목표로 언론사 입시 공부를 시작했다. 어떻게 공부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하고 있을 때 도서관 게시판에 언론사 스터디 모임을 준비한다는 메모가 눈에 띄었다. 이대 여학생 2명이 함께 스터디 모임을 할 멤버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음... 이대생들과 함께 언론사 스터디 모임이라.. 이거 연애도 하고 취업준비도 하고 꿩 먹고 알 먹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냉큼 연락을 했다. 


그리하여 총 4명의 스터디 멤버가 모였다. 매주 한차례 모여 모의고사를 치르고 답안지를 맞추고 함께 식사도 하고 웃고 떠들고 스트레스를 풀었다. 자칫 칙칙해지기 쉬운 복학생 시기를 그 스터디 모임 때문에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게 보냈다. 그렇게 1년여 기간을 준비한 뒤 졸업시즌이 다가오자 우리들은 시험 공고가 나오는 대로 시험에 응시했다. 다들 목표하는 방송사나 신문사가 있었지만 워낙 경쟁이 치열하여 어느 곳이라도 걸리면 감사한 상황이었다.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던 터라 어느 정도 기대는 하고 있었는데 MBC 문화 방송 입사 시험장에서  단 몇 명 뽑는 PD직에 몇 천명이 응시하는 것을 보고 그만 기가 질려 버렸다. 이후 KBS, 조선, 동아, 중앙 각종 케이블 TV까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정도 일 줄은 몰랐다. 함께 공부하던 멤버들은 원래 한 번에 붙기는 힘들고 졸업 후에 1~2년 정도 더 취업공부를 할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졸업 후 한가로이 1~2년을 취업 공부할 형편이 못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1~2년 공부 더한다고 합격을 장담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아쉽지만 스터디 멤버들과 작별을 고하고 일반 회사로 눈길을 돌렸다. 


(주식회사) 대우


여러 군데 시도를 한 끝에 대우에 입사했다. 지금은 '포스코 인터내셔널' 이란 회사로 사명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현대종합상사와 삼성물산과 함께 수출업무를 담당하던 대우그룹의 지주회사였다. 나는 서유럽지역에 자동차를 수출하는 부서에 배치받게 되었는데 출근 첫날 서울역 앞에 웅장하게 서있는 대우빌딩에 들어서며 감개가 무량했다. 불과 2~3년 전 제대 후 알바를 뛰던 곳이 그곳 지하 아케이드의 햄버거 집이었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이 되자 모든 것이 업그레이드되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생식당에서 식사 후 자판기에서 커피 뽑아먹는 것을 낙으로 삼던 내가  수출부서 직원답게 개인용 법인카드를 발급받고 고급 호텔에서 바이어들을 접대하게 된 것이다. 부서에는 서류작성 업무를 도와주는 일명 '짝지'라는 여직원이 보조를 해주었고  생전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출장이라는 것도 다니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스스로 내 모습이 너무 대견했다. 짙은 색 슈트를 차려입고 서류가방을 든 채 웅장한 건물의 로비로 들어서며 출근하는 나의 모습이 스스로 너무나 대견스러웠던 것이다. 


회사 생활은 즐거웠다. 매일 밤 밥 먹듯 하는 야근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당시에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이라는 캐치 프리이즈를 걸고 김우중 회장이 직접 자동차를 필두로 공격적인 경영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마침 최 일선에 선 부서가 자동차를 서유럽에 수출하는 우리 부서였던 것이다. 뭐라도 된 기분이었다. 내가 마치 세계경영의 최일선에 선 기분이었다. 비록 신입사원이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선배들의 원하는 자료를 정리해주고 공항에 나가 바이어들을 픽업해오고 그들의 호텔 체크인을 도와주고 식사접대를 하는 등의 사소한 일이었지만 밤늦게까지 부서에서 함께 일한다는 것 자체가 나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나의 생활은 일정했다. 눈 뜨면 출근하고 집에 오면 잠들었다.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면 오후에는 개봉동 교회 청년부에 출석했다. 당시 나는 청년부 회장이었으며 성가대 대원이었고 중고등부 교사였다. 주일이면 온종일 교회에서 시간을 보냈다. 



신앙인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다만 숨어 있었을 뿐이다


회사에서 나의 별명은 이 목사였다. 내가 회사에서 목사 취급을 받게 된 것은 순전히 신입사원 환영회 때문이었다. 부서에 배치받자 회식자리가 열렸다. 비록 회식자리이긴 했지만 새로 부서에 배치받은 나를 환영하는 자리이기에 부장님을 비롯한 각 팀의 팀장과 대리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한  공적인 자리였다. 소개가 이어졌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부장님이 따라주는 술잔을 받아 들고 내가 원샷에 들이키는 것이었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그 순간에 나는 순박한 얼굴로 부장님께 "부장님 저는 신앙이 있어서 술은 못합니다"라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순간 정적이 흐르고 부장님은 술병을 든 손을 어떻게 처리하실지 고민하셨다.  과장님들은 차마 못 볼 것을 본 듯 고개를 돌리셨고 대리들은 나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분노에 차서 말없이 눈을 부라렸다. 이후 나는 선임들에게 '올바른 직장생활'에 대한 끊임없는 훈계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평소 회사 업무에 열정을 가지고 임하는 나의 태도 때문에 그날의 사건은 그리 큰 문제는 안되었다. 오히려 나의 이러한 용감한 신앙 표현이 사내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모르던 옆 부서 과장님과 선배들이 사적으로 찾아와서 고백하며 실은 자신도 크리스천인데 나처럼 그렇게 용기 있게 신앙을 표현하지 못했노라고 나를 칭찬하기 일쑤였다. 그중에 한 분은 식었던 자신의 신앙심을 나를 통해 일깨웠다면서 이참에 사내 신우회를 재건할 것을 제안했다. 원래 회사에 신우회가 존재했었는데 바쁜 분위기에 다들 모일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신우회 재건의 막중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수요일이면 이 부서 저부서 돌아다니며 예배 모임을 광고했다. 다들 10분이라도 더 쉬기 원하는 점심시간에 자발적으로 뛰어다니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나의 신앙을 인정해 주었다


신앙인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다만 숨어 있었을 뿐이었다. 몇 주를 창피함을 무릅쓰고 홍보한 결과 수요일 점심시간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나에게 감사했다.   


서울역 앞 대우빌딩 뒤편엔 힐튼 호텔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두 빌딩 사이에는 호텔에서 관리하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대우 빌딩 6층과 막바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직원들은 6층의 직원 식당에서 점심을 마친 후 이곳에서 잠시 바람도 쐬고 휴식을 취한다. 그 정원 한 구석에는 남대문교회라는 오래된 교회가 있었다. 일반 교회라기보다는 건물이 오래되어 아마 유적 비슷한 관리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주 수요일 점심이면 그곳에서 신우회 예배모임을 가졌다. 처음에는 같은 부서 짝지 여직원들의 호응이 컸다. 아마 오랜만에 구경(?)해보는 건실한 기독청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 직원들도 예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몇 주 지나니 예배 모임에 피아노 반주자가 나타났다. 수려한 외모에 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자) 느낌이 나는 여성이었다. 전혀 교회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강남 스타일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알고 보니 같은 대우 빌딩에 입주해 있는 자동차 회사 광고팀 대리였다.  미혼의 남자 직원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미모의 광고팀 대리에게 쏠렸다. 나 또한 미혼인지라 관심이 갔지만 왠지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보여 곧바로 관심을 껐다. 대학 다닐 때 강남 살던 아이들과 쉽사리 친해지지 못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영어수업시간에 서로 짝을 지어 영어로 취미 등을 묻고 대답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나의 파트너가 강남 살던 여자애였다. 취미를 묻자 자연스럽게 스키라고 대답했고 방학 동안 뭐했냐고 묻자 유럽 여행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더 이상 공통의 화제를 찾지 못해 어색하게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어서 왠지 강남 분위기의 여성은 나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나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듯하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처럼 따르며 함께 근무하던 짝지 여직원이 슬쩍 전해 주 길 수요 예배모임 때 피아노 치는 여자분이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여자들의 직감이라나. 모임 때 내가 무슨 말은 하거나 행동을 할 때 얼굴 표정이라든지 반응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같은 여자로서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차도녀 스타일의 똑 부러진 여자는 나처럼 교회 오빠 스타일을 별로 안 좋아한다며 애써 부인했지만 다른 미혼 남자 직원들의 관심 대상인 미모의 광고팀 대리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부서 여직원의 직감이 담긴 첩보에 내심 기분은 좋았다.


이후 그 첩보의 진위 여부를 시험해 보고자 나도 차도녀의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나를 볼 때마다 표정이 밝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부터 용기를 가지고 말을 건네기 시작하니 반응이 예상외로 너무 좋아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광고팀 최윤지 대리... 그녀는 세련되고 똑 부러진 차도녀답게 나에게 먼저 대시를 해왔다.


그렇게 해서 직장 신우회에 열심이었던 교회 오빠는 광고팀의 차도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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