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엽 Oct 23. 2021

앞으로 4개월밖에 못 산다면?

시한부 생명

우리의 결혼식은 뻑적지근했다. 청첩장은 광고회사 카피라이터가 만들어 주었고 결혼식은 처가가 출석하는 강남의 유명한 교회에서 치렀다. 물론 주례는 교회의 당회장 목사님이 직접 해 주셨다. 결혼 축가 순서에는 양쪽 교회 모두 청년부가 총동원하여 두 번이나 하는 바람에 마치 콘서트 같았다.


신혼여행은 호주 시드니로 정했다. 아내는 도시 여자답게 뉴욕으로 가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자고 했고 나는 촌놈답게 사이판이나 발리에 가서 쉬고 오자고 했는데 그 절충이 호주 시드니였다. 오페라하우스도 방문할 수도 있고 발리처럼 리조트도 있다는 여행사 직원의 절충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내는 강남에서 태어나 자란 도시 여자답게 럭셔리했다. 강남의 구석구석에 있는 맛집을 데리고 다니며 나의 눈과 귀와 입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신앙이 매우 깊어 중학생 때 스스로 신앙을 가진 이후에 부모님을 전도하여 당시 신앙이 없던 부모님이 교회의 장로와 권사가 되었을 정도였다. 장인 장모는 자신의 딸이지만 늘 신앙의 선배라며 딸을 각별하게 대했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새 아파트에 새 자동차를 샀으며 첫아들을 출산했다. 나도 대리로 진급했고 아내와 연봉을 합하면 부장님 연봉보다 많았다. 가족의 생일 때면 의례 호텔 뷔페를 예약했고 휴가철이면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지를 찾았다. 그야말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뒤 늘 떠나지 않았던 삶에 대한 의문 같은 것은 이제 하나도 남지 않았다. 삶이 이렇게 꿀맛인데 무슨 의문이 있겠는가?


행복한 사람은 삶에 질문이 없다


나는 확실히 알았다 삶의 의미, 인생의 의미 같은 질문은 고난 가운데 나온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그것이 정말 궁금해서가 아니라 지금 나의 삶이 괴롭다는 의미이다. 인생에 있어서 괴로움의 문제, 생로병사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더 이상 삶이 어떻고 인생이 어떻고 하는 질문은 하지 않을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삶에 의문이 없다


아내와 나는 양가 부모님들의 자랑거리였다. 아버지는 새 며느리를 자랑스러워했으며 장인 장모는 믿음 좋은 사위를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결혼 후 옮긴 대형교회에서 순장이라는 공동체 리더의 직분을 맡는 등 여러모로 안정적인 삶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적어도 아내가 둘째를 출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날 퇴근 후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머리 뒤쪽에 조그마한 혹이 만져진다고. 그리고 얼마 후 아내는 둘째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머리 뒤쪽 혹은 점점 커졌다. 혹시 모르니 조직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아내는 조직 검사를 위해서는 마취하고 조직을 떼어내는 등의 시술을 해야 하는데 임신 중에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출산 후에 하기로 연기를 했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라 나도 동의했다. 강남 성모병원에서 둘째 딸아이를 무사히 출산한 후에 아내는 머리 뒤쪽 혹에 대한 조직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피부암이었다.


본래 피부암은 국소암이기 때문에 조기 발견 시에는 그 부분을 떼어내고 치료하면 대개는 생명에는 이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의 경우 임신 기간 동안 암세포가 활발하게 성장하여 전신에 암세포가 퍼졌다고 한다. 대개 이런 경우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아내가 떠나기까지 1년 정도 걸린 것 같다. 그 기간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첫 진단을 받고 강남 성모 병원에 입원했다. 비록 치료가 어렵기는 했지만 실낱같은 희망은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 선생님은 젊은 나이에 아이를 출산하고 암에 걸린 아내에게 각별히 신경은 써 주셨다. 우선은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경과를 지켜보고  암세포가 퍼진 부위를 수술하자고 했다. 참으로 힘든 기간이었다. 말로만 듣던 항암치료는 그야말로 옆에서 못 볼 지경이었다. 매일마다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아내는 절규했고 약물 투여 횃수가 늘어갈 때마다 고통 가운데 몸부림쳤다. 몇 개월간의 악몽 같은 약물치료 기간이 끝나자 수술을 했다. 머리 뒤쪽부터 어깨 부위까지 절개하는 대 수술이었는데 비록 암세포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지만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아내가 젊은 여성임을 감안해 수술 흉터가 보기 싫게 남을까 봐 특별히 신경 써서 절개 부위를 봉합할 때는 성형외과 의사 선생님을 따로 불러 봉합하게 했다고 귀띔해 주셨다. 그만큼 각별히 신경을 써 주신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몇 개월 기다렸다 경과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 기간 동안은 퇴원을 하여 처가댁에 머물렀다. 어느새 둘째 딸아이가 태어난 지 백일이 되었다. 아내는 가발을 맞춰 쓰고 아기의 백일 기념 사진첩을 만들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어느 날은 갑자기 홈쇼핑으로 캠코더를 주문했다. 전에는 내가 그렇게 사자고 졸라도 꿈쩍도 하지 않더니만 Sony 캠코더를 주문하고 아이와 자신의 모습을 많이 찍어 달라고 했다. 나는 불안했다. 다시금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생겨났다. 그래서 또다시 신앙의 힘을 빌어보려 했다. 그래 나에겐 하나님이 있지 않은가?


나는 강남 금식기도원에 들어갔다. 1주일간 금식하며 하나님에게 매달렸다.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없지 않냐고 따져 물었다. 아내와 나는 회사 신우회에서 만났고 부모님께는 효도하고  교회에서는 헌금도 많이 하고 열심히 봉사했던 리더급 신자였는데 도대체 왜 이런 슬픈 일을 겪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매일 밤 아내를 살려달라고 떼를 쓰며 기도했다.    


불행이 찾아오자 그동안 잊고 지내왔던 삶에 대한 의문이 다시 물밀듯 찾아왔다. 인생에서의 희로애락은 왜 있는 것일까? 생로병사의 고통은 왜 있는 것일까?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왜 태어나는 것일까?

어머니의 죽음 때에는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이 실제적으로 존재한다는 선에서 질문이 마무리되었지만 이제 막 어린 딸을 출산한 아내의 암투병 앞에서는 그 정도 선에서 만족이 안되었다


죽음 이후에 아무리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산다고 해도 지상에 남겨있는 어린 생명들은 어찌하란 말인가?아무리 생각해도 신앙 좋은 아내가 어린아이들을 놔두고 죽는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밤마다 울부짖으며 기도했지만 남들이 체험한다던 신비한 음성도 어떠한 체험도 일어나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지쳐갈 때쯤 기도원에서 나가는 버스를 타기 전 마지막 집회에 참석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아내를 살려달라고만 기도했다. 그런데 약간 신기한 경험을 했다. 나는 분명 아내를 살려 달라는 한 문장으로만 맥없이 기도했을 뿐인데 나의 입술에서는 끊임없이 "상황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해서 나왔다. 분명 내가 말하는 것이었지만 말하면서도 나는 "아니 이게 무슨 뜻이지? 상황으로 인도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지?" 하며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정말 신기한 현상이었다.


집회를 마친 후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 평온해졌다. 1주일 금식한 사람답지 않게 힘이 솟았다. 마치 군대 훈련병 때 처음으로 군대 교회에 나가 찬송 몇 곡 부른 후 갑자기 힘을 얻었을 때와 비슷한 경험이었다.


나는 이것을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하나님은 살아계셔! 아내를 살려 주실 모양이야. 나는 확신했다. 집에 돌아와 이 경험을 아내와 처가 식구들과 나누었다. 모처럼 가족 분위기가 밝아졌다.


이후 나는 아내의 완치를 확신했다. 의사들이 뭐라 하든 나는 개의치 않았다. 현대 의학이 하나님의 기적에 대해 뭘 알겠는가!


강남 성모병원의 주치의는 아내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PET 사진을 찍어 보자고 했다. 찍으나 마나 하나님이 살려 주실 텐데.. 생각하며 서울대 병원에서 PET 검사를 했다. PET 사진을 찾으러 혜화동 서울대 병원에 가면서 아내와 나는 대학로에서 오삼불고기를 사 먹었다. 그만큼 검사 결과를 낙관했던 것이다.


PET 사진을 검토하던 강남 성모병원의 의사 선생님의 표정은 심각했다. 줄어 있어야 할 종양이 더 커져 있었던 것이다. 더 안 좋은 것은 암세포가 임파선으로 전이되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치료가 어렵다는 것이다. 의학적 소견으로는 앞으로 길어야 4개월 정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항암치료와 함께 수술을 병행하면 6개월 정도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지만 자신은 그것을 권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고통스럽게 6개월 생명을 연장시키기보다는 퇴원하여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임종을 준비하는  쪽을 권해 주었다. 병원 측에서 본다면 수술을 권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익이겠지만 의사 선생님은 진심으로 우리 부부를 위하여 개인적으로 조언해 주었던 것이다.


4개월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고 퇴원하는 우리 부부에게 의사 선생님은 은밀히 모르핀 한 봉지를 건네주었다. 일종의 순도 높은 마약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모르핀을 쥐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육체적 고통 중에 가장 극심한 고통 중의 하나가 말기 암환자가 겪는 고통입니다. 아내분의 경우 임종을 앞두고 암세포가 신경 부위를 자극할 것인데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는 이 모르핀을 환자가 달라는 만큼 마음껏 주시기 바랍니다"


건네는 약봉지는 받아들었지만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내는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차도녀 광고팀 대리와의 결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