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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Sep 23. 2022

일만 달란트

사실 알고 나면 엄청난 이야깁니다

요즘 제가 달란트 이야기를 자주 하고 있는데


성경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 빚진 종 이야기는 

용서에 관한 대표적인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불쌍해서

그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는데


그 탕감받은 종이 길을 가다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을 진 동료를 만나

빚 갚으라고 독촉하고 옥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임금에게 다시 붙들려

꾸짖음을 당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말미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네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는 말씀으로

이 이야기가 용서에 관한 이야기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성경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 이야기가 단순히 용서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이야기가 나오게 된 맥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설교 중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그러니까 베드로의 질문은

나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참아 주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일곱 번은 

참아 주는 것의 한계치였을 것입니다


사실 배신한 친구를 한번 두 번, 세 번도 아닌 일곱 번까지

참아주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어

일곱 번이 아닌 그것의 70배 

즉 490번까지라고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일곱 번이 

그저 숫자 일곱이 아니듯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흔 번씩 일곱 번 또한 

숫자 490번 뜻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용서를 몇 번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 자체가 

의미 없는 질문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즉 용서에는 단순히 참아주는 것 이상의 

또 다른 의미가….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이어서 

곧바로 말씀하시는 내용이 

바로 오늘 살펴보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시는 분들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이야기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지..)


자신이 빚지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한 


진정한 용서를 하기 힘들다는 

메시지를 이끌어 냅니다 


교리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매우 훌륭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보통은 이 비유를 통해

자신은 용서받았으면서도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자신이 용서받은 것처럼 

남을 너그럽게 용서해야 한다는 식의

열심히 노력하자는 식의 설교가 많은데


 그보다는


자신이 도저히 갚을 길 없는 빚, 

즉 원죄를 안고 태어난 존재라는 깨달음이 없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용서는 

불가능하다는 가르침이 훨씬 더 성경적, 

교리적인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용서는 

하기 싫어도 참고 억지로 하는 어떤  

인내를 요하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깊이 깨닫는 데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자기반성적 행위입니다


자신과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가 

곧 용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용서는 사랑과 닮아 있습니다


이웃을 나와 같이 여기는 것이 사랑인데

이처럼 이웃 또한 나와 다름없는.. 

도저히 값을 길 없는 빚진 존재라는 


이해와 깨달음이 

용서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예수님은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신 다는 점입니다


즉 이 이야기는 다름 아닌 천국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아니..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이야기가 

분명 용서에 관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이 이야기가

하나님 나라, 천국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 이야기가 

왜 천국에 관한 이야기 인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이야기를 당시 청중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면 

먼저 일만 달란트니 백 데나리온이니 하는 

화폐 단위에 대한 감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학자들에 따르면 보통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과 같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고 하니

얼추 계산해 보아도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20년 치 품삯입니다


하루 품삯을 10만 원으로 친다면 

한 달란트는 약 6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만 달란트는 6억 원의 일만 배

약 6조 원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당시 한 나라 전체의 세금 수입이 몇백 달란트..)


일개 개인이 일만 달란트나 하는 빚을 질 일은 흔치 않으며

또한 말 한마디로 그 많은 돈을 탕감받느니 마느니 하는 것은

분명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과장된 이야기임이 틀림없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크게 보면 우리의 구원에 관한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흔히들 성경의 주제는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또한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있는 것이기에

결국 성경의 주제는 

우리의 구원, 천국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이란 것이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님은 

제가 이미 수차례 반복해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 천국, 하나님 나라를 여러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때론 하나님과의 관계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하고

때론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하나님 나라의 속성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또한 직접적으로는

억눌림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즉 자유함을 얻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구속으로부터 벗어난다..

자유롭게 된다라고 했을 때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감옥에서 풀려나거나 포로생활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또한 병든 자가 병에서 벗어나거나 

귀신 들린 자가 제정신이 돌아오거나

눈먼 자가 눈을 뜨게 되는 것도 

구속에서 풀려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갚을 길 없는 빚을 탕감받는 것 또한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 구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해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는 걸 생각해 본다면

빚을 탕감받는 것이 구원과도 같다는 말이 이해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경우 문제는 

감옥에 있다가 풀려나거나

병에 들었다가 치유받는 사람들과는 달리...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빚진 자임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만 달란트나 되는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떠한 빚을 진지도 모르는 사람은

빚을 탕감받아도 아무런 감흥이 없을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비유에서 빚진 자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그는 단순히 자기는 빚을 탕감받았으면서도

남은 용서 못하는 염치없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진 빚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일 뿐이고

이는 일만 달란트라는 돈이 애초에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참으소서 내가 곧 갚겠나이다

라는 그의 말에서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빚진 자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빚을 집니다


아기는 부모로부터 생명의 빚을 집니다

어린 아기는 부모의 보살핌으로부터 

도저히 갚을 길 없는 양육의 빚을 집니다


또한 자라나면서 친구로부터, 사회로 부터

존재됨의 빚을 지게 됩니다


사람을 뜻하는 한자어 인간은 사람인에 사이 간자를 쓰는데

사람 사이에 있어야 인간이란 뜻입니다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한 사람이 살아 숨 쉬며 기동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존재가 필요하며

이들의 가치는 값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당연히 내가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빚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려야 할 것이 없어지면

동료에게 백 데나리온 독촉하듯이

쉽게 불평과 분노에 휩싸입니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은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가는 

태생적으로 이기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평범한 모든 사람의 모습일 뿐입니다


성경의 원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슨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내가 왜 죄인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원죄는 

단지  법을 어겨 짓는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천적으로 하나님께 빚을 갚지 못하는 

모든 인간의 처지가 곧 원죄입니다



그리고 이 원죄를 깨달은 사람..

자신이 갚을 길 없는  빚을 진자요 

원죄를 지은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은 

이미 구원의 길에 들어선 사람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회개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임을 

깨달은 사람의 용서는

더 이상 용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갚을 길 없는 빚을 진 존재라는

철저한 자기 인식이 있는 사람의 용서는

그 자체로 사랑이요 자비요 긍휼입니다


왜냐하면 

남을 더 이상 남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일만 달란트 비유는

단순히 남을 용서하자는 권면의 메시지를 넘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메시지 임과 동시에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참된 구원이 무엇인지

 또한 

천국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천국이란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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