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재택근무는 재택근무일까?

살림과 업무의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나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by 완벽한 엄마


갑작스럽게 재택근무를 하게 됐다. 단, 하루였지만.



회사에서는 나의 개인적인 사유로(예를 들어 아이 때문이라던지) 재택근무를 해야 할 때

편의를 봐주기 때문에 업무가 굉장히 자유롭다.

이번에는 개인적인 사유는 아니었다. 팀장이 야외 촬영이 있어 출근하지 못한다면서,

나에게도 그냥 재택근무를 하라고 했다. 팀장이 하라고 했으니 별다른 생각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그래서 시작된 재택근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 놓고 청소기부터 돌렸다. 집에 있으니 청소할 곳이 눈에 띄었다.

청소기를 돌리면서도 시계를 계속 쳐다봤다. 10시부터 업무를 시작하면 되겠구나.

그 와중에 부엌을 청소하다 밀린 설거지가 눈에 띄었다.

설거지는 금방 하니까, 라는 생각으로 설거지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금방 끝나지 않았다.

어느새 10시가 넘었다. 나의 업무 시간은 일 5시간이다. 아이는 4시가 넘어 데리러 간다.

그럼 11시부터 해도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건조기에 처박혀있던 마른빨래들을 꺼냈다.

TV 앞에 앉아 빨래를 개는 건지, TV를 보는 건지 모르게 집안일을 하고 있자니,


지금 나는 직장인인가 전업주부인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원래 집에 있을 때도 나는 혼잣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남편도 내 혼잣말 때문에 여러 번 혼란스러워했다. 자기한테 질문한 거냐고 묻기도 했다.

남편은 그런 내 습관 때문에 딸이 말이 빠른 거라고 누누이 얘기했다.

그래서 그게 좋다는 건지, 아니면 나쁘다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는 개키기 싫은 빨래들을 억지로 개켜 옷장 안에 넣고 먼지가 앉았을 그 자리에

다시 청소기를 돌렸다. 오늘은 청소만 하다 끝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출근하기 시작한 후부터 집안일을 잘 신경 쓰지 못했더니 자꾸만 흐트러진 부분들이 보였다.

집에 있을 때만큼은 그런 부분들을 바로 잡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밀려왔다.

주말에는 마냥 쉬고 싶으면서 평일에는 어쩜 그리도 부지런한 척을 하는지.






10시가 되어 커피를 한 잔 타서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어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니지, 이럴 때가 아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일을 시작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점심도 거르고 일을 했다.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생각에 점심시간도 잊고 일을 했다.

나는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는가, 일을 하기 위해 살고 있는가. 잠시 헷갈렸다.


그래도 사람이 먹고는 살아야지.

냉장고를 열어 있는 반찬, 없는 반찬을 전부 꺼냈다. 시간을 아끼자. 황급히 먹어치웠다.


나는 먹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 집에 있을 때 늘 평일 점심은 이런 식이었다.

지금도 일을 하지만 굶는 날이 더 많은 것 같다.

집안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한몫은 차지한 듯싶다.

나 혼자 먹는 점심 한 끼로 사치 부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점심을 굶었다.



어느새, 아이가 돌아올 시간이다.

아이와 어린이집 앞 놀이터에서 잠시 놀아준 뒤에 데려와서 씻겼다.

그리고 저녁 먹을 준비를 하는 사이 남편이 집에 도착했다.





오늘 내 하루는 '업무'가 아니라 '살림'이었다.



엄마로서가 아닌 나 개인으로서의 재택근무라면 얘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재택근무는 참으로 피곤했다.

아마 집안의 흐트러짐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내 피곤한 성격 탓도 있을 것이다.


살림과 업무의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나를 보고 있노라니 나 스스로 더 피곤해졌다.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하게 느껴졌다.


나는 언제나, 언제까지나,

일하는 엄마라는 내 모습이 자랑스럽고 멋지게 느껴질까?

계속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며 살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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