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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만추 Mar 20. 2020

_진짜진짜최종.hwp

이런 글은 쓰고 싶지 않아

토할 것 같아. 새벽 햇살이 벽에 까만 책상을 그리고 있었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책상 그림자를 볼 여유 따위 없다. 토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자마자, 몸을 감고 있던 이불을 걷어차고 화장실로 냅다 달렸다.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책상 그림자가 보였다. 이부자리로 돌아가는데 아까와는 달리 발가락이 움츠러들어 걷기가 불편했다. 눕자마자 이불을 목까지 덮는데 엄마가 물었다.      


-노만추야 아직도 심해?

-응.

-손 따 볼래?      


어렸을 적 나는 소화 기관이 좋지 않아 자주 체했다. 멀리 나갈 때면 엄마는 사이다랑 가스 활명수를 챙겼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몇 살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데, 뭘 먹었는지 나는 또 체해서 골골거리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내 손을 잡고 ‘임란규 소아과’에 데리고 갔다. 언젠가 엄마가 동네 아줌마들과 이야기를 하며 '임란규 소아과'가 참 괜찮다고 칭찬을 하던 기억이 났다.

  

-포카리스웨트 같은 이온 음료를 수시로 먹이세요. 물 대신 먹이세요.     


의사 선생님의 한 마디에, 우리 집 냉장고엔 포카리스웨트가 한 달 동안 마르질 않았다.      


-먹기 싫은데.

-안돼 먹어야 해.

-체한 건 대체 언제 낫는 거야.     


엄마는 내가 나을 때까지 계속 포카리스웨트를 먹였다. 의사가 물 대신 포카리스웨트를 먹이랬다고, 엄마는 진짜 물 마실 때도 포카리스웨트를 마시게 했다. 이젠 포카리스웨트 때문에 토할 것 같았다. 그때 이후로 작년 대장내시경을 받기 전까지 포카리스웨트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 30대의 엄마는 정도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내가 똑 닮았다.     


토할 것 같은데. 창 밖에서 쓰레기 수거차 소리가 들렸다. 체한 게 아니었으니 이번엔 진짜 들린 게 맞다. 20일(그러니까 오늘)까지 제출해야 하는 지원서를 쓰다가 눈을 좀 붙여볼 참이었다. 뭐 이리 쓰라는 게 많은지, 그날 하루에만 몇천 자를 쓴 것 같았다. 그날뿐이 아니다. 작년 10월부터 지금까지 지원사업이 뜨는 족족 지원서를 써댔으니 그게 다 몇 자인가. 그야말로 난 지원서에 체한 것이다.      


사실 지원서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글쓰기 부류다. 나를 어필해야 하는 글쓰기. 그러기 위해 나의 경험을 수치화해야 하는 글쓰기.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 게 인생인데, 향후 5년간의 성장 비전을 제시하고, 올해 집필할 희곡의 기대효과를 적어 내야 하는 글쓰기. 싫다, 싫어. 당장 지원서 파일을 삭제하고 노트북을 닫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나는 꾸역꾸역 지원서를 쓴다. 공연을 만들기 위해선 지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지원서에 허덕이고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작년 말과 올 초에 지원했던 사업에 모두 떨어졌기 때문이다. 체한 게 나을 때까지 포카리스웨트를 마셨던 것처럼, 지원사업에 붙을 때까지 지원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정말 토할 것 같다. 체해서 골골거리던 어린 시절의 나는 포카리스웨트를 컵에 따르며 기대했다. 이걸 다 마시면 낫겠지? 지원서를 쓰는 일이 토할 것 같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내가 싫어하는 글쓰기 여서도 맞고, 너무 많이 써서도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지난주에 제출한 지원서는 4월 아니면 5월 즈음 발표가 날 것이다. 오늘 제출하는 지원서도 그때 즈음 발표가 날 거다. 둘 중 하나만 쓰고 싶었다. 일주일 간격으로 지원서 두 개를 쓰는 건 포카리스웨트 두 병을 한 번에 털어 넣는 것과 같다. 그것도 1L짜리로. 고민하다 두 병을 한꺼번에 털어 넣기로 했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인지라 너무 불안했기 때문이다.      


체한 딸을 둔 30대의 엄마도 불안했던 것 같다. 우리 딸이 계속 안 나으면 어쩌지? 그래서 그렇게 포카리스웨트를 쉬지 않고 사다 날랐던 모양이다. 엄마를 똑 닮은 30대의 나는 생각한다. 지원서, 이번에도 떨어지면 어떡하지? 다행인지 끔찍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 지원서 냉장고엔 아직 마셔야 하는 포카리스웨트가 3병 더 남아 있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을 꾹꾹 눌러 가며 쓴 지원서를 지금쯤 손에 들고 있을 심사위원들에게 말하고 싶다.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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