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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만추 Mar 27. 2020

<이런 글은 쓰고 싶지 않아>

10분 희곡

등장인물

혜준 : 여성. 이제 막 데뷔한 극작가

배우A(ㅅㅎ) : ‘혜준’이 쓰는 극의 주인공

배우B(ㅎㅅ) : ‘혜준’이 쓰는 극의 또 다른 주인공     


※ 배우A와 배우B가 하는 말은 혜준에게 들리지 않는다.

※ 배우A와 배우B의 이름은 초성에 맞는 이름 어느 것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모두가 잠든 새벽     


혜준의 방과 혜준의 머릿속 그 어딘가     


혜준의 방 왼편에는 나무로 된 책상이 있다. 책상 위에는 책들이 규칙 없이 쌓여있고, 여기저기 펼쳐져 있다. 책상 한가운데에는 하얀색 노트북이 있다. 노트북 주변으로 과자 ‘아이비’ 봉지가 뜯어진 채로 있다.




사위가 밝아지면,

배우B와 배우A가 벤치에 앉아 있다.  

   

배우A : 연락 왜 안 받았어?

배우B : …

배우A : 문자라도 달라니까.

배우B : …

배우A : 무슨 말이라도 해봐.

배우B : 왜 이렇게 춥게 입고 나왔어. 당분간은 춥대. 따뜻하게 입고 다녀.

배우A : …정말, 마지막이구나.

배우B : 감기 걸리겠다. 그만 가자. (일어선다)

배우A : (배우B의 옷깃을 잡으며) 가지 마.

배우B : 이럴수록 더 힘들어져. 약속했잖아, 우리.

배우A : (배우B를 껴안는다) …

배우B : (배우A를 떨어뜨리며, 달래듯) ㅅㅎ아, ㅅㅎ아. 응?

배우A : 사랑해.

배우B : …

배우A : 우리,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돼?

배우B : 다시 생각해도 똑같을 거야. 그래, 처음 며칠은 좋겠지. 그런데 그 감정은 얇은 종이 같아서 조금만 바람이 불면 찢어지고 말 거야. 알잖아.

배우A : 같이 이겨내면 되잖아.

배우B : …또 서로 상처만 줄 거야.

배우A : 뭐가 그렇게 겁나?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배우B : …

배우A : 너 나 없이 버틸 수 있어? 나 봐봐. 내 눈 봐봐. 사랑하잖아, 너 아직 나 좋아하잖아. 이러면서 어떻게 헤어져, 어떻게 그래.

배우B : …

배우A : 같이 이겨내자. 이겨낼 수 있어.      


배우A와 배우B, 입을 맞춘다.      


혜준 :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격정적으로 키스를 하던 배우들, 키스를 멈추고 어색하게 떨어진다.

혜준, 노트북 옆에 있는 ‘아이비’과자를 한 입 베어문다.     


혜준 : 그 놈의 용기, 용기, 용기! 아니 지금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입안에 털어 넣을 쌀 한 톨이 없는데 용기를 내라고? 사라앙? (주먹으로 노트북 자판을 치며)이거는 ㅎㅅ이가 용기를 못 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가 문제라고 사회구조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해도, 내 손에 들어오는 건 꼴랑 백 이십만 원인 사회! 그마저도 교통비에 핸드폰 요금, 월세 내고 나면 끝인 개 같은 사회! 컵라면 살 때 900원짜리 ‘참치 마요’ 삼각김밥을 살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사회! 그래서 사랑도 결혼도 포기하게 만드는 더러운 사회! 야, 김혜준. 작가라면 이런 걸 집어내야 되는 거 아니야? 지금 내가 써 놓은 글은 개인을 비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잖아. 죽어가는 사람한테 용기 내라고 총구를 들이미는 거 밖에 더 돼?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혜준은 ‘다시, 다시’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이 쓴 글을 지운다. 손가락과 자판이 맞닿는  소리가 거칠게 난다. ‘아이비’과자 하나를 입 안으로 욱여넣고는, 양 손을 자판 위에  올려놓는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자판을 다시 치기 시작한다.     


타닥타닥.

자판 소리에 맞춰 배우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배우A : 연락 왜 안 받았어?

배우B : …

배우A : 문자라도 달라니까.

배우B : …

배우A : 무슨 말이라도 해봐.

배우B : 왜 이렇게 춥게 입고 나왔어. 당분간은 춥대. 따뜻하게 입고 다녀.

배우A : …정말, 마지막이구나.

배우B : 감기 걸리겠다. 그만 가자. (일어선다)

배우A : (배우B의 옷깃을 잡으며) 가지 마.

배우B : 이럴수록 더 힘들어져. 약속했잖아, 우리.

배우A : …(운다)

배우B : 왜 울고 그래.

배우A : 슬퍼서. 네가 그리고 내가, 지금 우리의 상황이 너무 슬퍼서.

배우B : …(배우A를 안는다)

배우A : 돈이 뭐라고, 종이 쪼가리 그게 뭐라고 날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만드는 거야. 그깟 돈이 뭔데,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 하나 사는 걸 고민하게 만드는데, 사랑하는  사람한테도 사랑한다는 말을 못하게 하는데. 왜,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구질구질 한  건데, 왜!

배우B : 미안해…

배우A : 네가 왜 미안해해. 네가 왜!     


배우A, 배우B 엉엉 운다.     


배우A : 열심히 살면, 언젠가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배우A, 가방에서 칼을 꺼낸다.     


배우B : 뭐하는 거야.

배우A : 이제 너무 지쳤어. 그만 할래.

배우B : (칼을 뺏으려 하며) ㅅㅎ아, 너 왜 그래.

배우A : (배우B에게서 멀어지며) 우리 다음 생에서는 꼭 부자로 태어나자. 그래서 배고플 때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재밌는 영화도 보러 다니고, 그렇게 마음껏 사랑하고 행복하 자. (칼로 배를 찌른다. 고통스런 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배우B : (쓰러지는 배우A를 안고서는) 안 돼, 안 돼!

혜준 :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죽는 건 안 돼. 지난번에도 써먹었단 말이야!      


배우A, 벌떡 일어선다.     


혜준 : 아니 왜 나는 죽는 것 밖에 생각을 못 하지? 뭐 신박한 결말 없나? (손가락으로 머 리를 두드리며) 생각해 내. 생각해 내라고! 김혜준, 생각해 내. 생각이 안나, 난 망했어. 내 공연 보는 관객들이 말하겠지, 이 작가는 맨날 똑같은  인물에 똑같은 주제에 똑같은 결말이라고. 존나 다 진부하다고!

배우B : 그냥 대충 써도 될 것 같은데.

배우A : 일단 관객을 만나는 게 중요한 것 같은데.

배우B : 그니까.

혜준 : 안 돼! (책상의 책을 뒤지며) 새로운 게 필요해, 새로운 거.      


혜준, 책상뿐만 아니라 책상 아래도 뒤지기 시작한다.

배우A,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배우A : 에휴, 오늘도 글렀네 오늘도 글렀어. (배우B에게) 야, 너도 앉아. 쟤 앞으로 한 세 시간은 글 안 쓸 거야.  

배우B : (앉으며) 그 레파토리인가.

배우A : 그 레파토리!

혜준 : (DVD를 들어 올린다) 그래! 좋은 걸 봐야 좋은 게 나오지.      


혜준 노트북에 DVD를 넣고 재생시킨다. 노트북에서 영화 소리가 흘러나온다. 앉아 있던 배우들 립싱크를 하며, 영화 속 장면 을 재현한다. 천연덕스럽게 조금은 과장되게. 그렇게 영화의 한 장면이 끝이 나고, 혜준은 얼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다.     


혜준 : 못 써. 이걸 뛰어넘는 글을 어떻게 써. 와, 말이 안 나온다 말이 안 나와. 와, 뭐 괴물인가? 와. 난 뭐냐. “이제 지쳤어 그만 할래.” 쓰레기를 쓰고 앉았네, 쓰레기를 쓰고 앉았어. 재능도 없으면서 왜 작가한다고  설쳤지?

배우A : 그럼 때려 쳐!

혜준 : 아니야. 이 사람이라고 처음부터 잘 썼겠어? 교수님도 말씀하셨잖아, 재능 있는 사람 은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라고.

배우B : 그래, 그니까 이제 좀 써라. 벌써 새벽 세시다.     


혜준, 노트북 자판 위에 양 손을 올린다.     


배우A  : 오. 쓴다, 써.     


배우A와 배우B, 혜준이 무언가를 쓸 때는 월드컵 경기에서 우리 팀 선수가 골을 넣은 것 같은 반응을, 혜준이 자신에 글에 태클을 걸고 지울 때는 상대편이 골을 넣은 것 같은 반응을 한다.        


혜준 : (무언가를 쓰다가) 이건 아까 영화에서 봤던 거랑 너무 똑같은데. (글을 지우며) 스펀 지도 아니고 뭘 이렇게 쏙쏙 빨아들이냐, 영화 보지 말걸. (무언가를 쓰다가 지우며)  대사가 너무 유치해. 세상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딨냐. (쓰다가 멈추며) 이건 또  너무 작가의 말이잖아. ㅎㅅ이 성격에 이런 말을 하냐고. (지운다)

배우B : (지친 듯) 에이, 씨발.

혜준 : 씨발?

배우B : (놀란 듯 손으로 입을 막는다)…

혜준 : 씨발 그거 혐오표현 아닌가? (노트북을 두드리며) 씨발의 어원. (마우스를 내려가며 노트북을 뚫어져라 본다) 애매한데. 쓰지 말자, 쓰지 말자. (무언가를 쓰다가 지우며) 너무 ‘뜬금포’잖아. 바보인가  왜 이렇게 논리가 없어. 초등학생 때 ‘프린세스 메이커’ 그만하고 논술학원이나 다닐 걸. (쓰다가 또 멈추며) 재미가 없어, 재미가! 쓰는 나도 재미가 없는데 다른 사람은 어떻겠냐고.  

     

혜준, 노트북에 머리를 박고는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굴린다.     


배우B : 치킨 시킬까.

배우A : 지금도 배달되나.

배우B : 이 앞에 24시간 배달하는 곳 생겼던데.

배우A : 반반 무 많이, 콜라 큰 걸로?

배우B : 콜.

배우A : 콜!

     

배우B,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혜준,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지른다.      


배우B :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리며) 아이씨, 진짜 쫌 제발 쫌!

배우A : 이 지지배야 소리 지른다고 안 쓰던 글이 써지냐?

혜준 : 배고파.

배우A : 뭐?     


혜준, 손을 덜덜 떨며 ‘아이비’ 봉지를 뜯는다. ‘아이비’를 입안으로 계속 넣는다. 우걱우걱 ‘아이비’를 씹어 삼키던 혜준, 목이 막혔는지 기침을 한다. 요란스럽게 기침 을 하다가 울기 시작하는 혜준.

     

혜준 : 무서워. 못 쓰겠어 어떡해, 한 글자도 생각이 안나. 나는 왜 이렇게 못 쓰는 거야,  왜 항상 이 모양인 거야. 잘 쓰고 싶은데, 한 글자도 못 쓰겠어. 이렇게 살다가 죽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아무것도 못 쓴 채로 죽을 것 같아. 너무 무서워, 무섭다고.

배우A : (등을 쓸어주며) 쓰다가 먹다가, 먹다가 울다가.

배우B : (혜준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어쩌겠어, 이겨내야지.      


사위가 점점 어두워진다. 혜준의 울음소리 계속 이어진다.

어느 순간, 혜준의 울음소리를 뚫고 타자 치는 소리가 들린다. 타닥타닥.

타자 소리는 거침없이 나아가다 멈춰서고 이내 머뭇거리다가 다시 세차게 나아간다. 그 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영원히 그렇게, 타닥타닥 또 타닥타닥.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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