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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슬픔이 등 뒤에 딱 달라붙어 나를 괴롭혔다. 슬픔은 떼어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양할 테다. 나는 말을 해야 가벼워지는 사람이었다. 가까운 지인 몇몇에게 내가 겪은 일을 털어놓았지만, 문득문득 슬퍼지는 건 여전했다.
슬픔은 A씨와의 전화 통화 후에 찾아왔다. 그녀는 재단의 직원이었고, 나는 재단의 지원금을 받아 공연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A씨와의 만남은 운명적이라면 운명적일 수 있겠다. A씨가 담당하는 사업에 내가 지원했고, 마침 내가 붙었으니 말이다. 지원 사업 공고문을 지나쳤거나, 심사위원이 다른 프로젝트를 선정했다면 우리는 만나지 않을 사이였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모른 채, 몇 번의 전화로 목소리만 주고받았다. 그날은 지원금 교부신청과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어 전화를 걸었다. 궁금증은 그녀의 한 마디로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이제 공연 제작에 집중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할 즈음 문제가 생겼다. A씨가, 사업이 끝나고 정산보고를 할 때 인건비에 적힌 모든 역할에 대한 창작 활동 증빙자료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네?’라고 되물었다. 이미 계약서와 입금확인증, 홍보물 크레딧을 제출하는 데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A씨는 스태프가 작성한 페이퍼워크, 연출 노트, 작가의 대본 같은 것들을 추가로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행정 언어에 조금은 익숙한 사람이었다. 선거 캠프와 박물관, 문화재단에서 잠깐이지만 사무직으로 일한 경험이 나에게 행정 언어의 근육을 만들어줬다. 그러나 페이퍼워크, 연출 노트라는 말을 듣자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이런저런 상황을 예로 들어가며 공연 작업을 문서화하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그녀는 반드시 우리의 언어를 당신들의 언어로 번역하길 바랐다. 번역할 수 없는 단어까지 모두 번역해주길 바랐다. 이런 일은 작년에도 있었다. 나와 동료들은 일을 시작하기 전마다 다양한 각도의 사진 세 장을 찍어야 했다.
지원금을 받아 공연을 만드는 일이란 늘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항상 공연 언어를 지우고 이해할 수 없는 행정 언어를 중얼거려야만 했다. 이번 일은 더더욱 이해 가지 않았다. 그녀가 요구한 자료는 지원사업 공지사항에도 집행·정산 매뉴얼에도 나와 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재단에서는 사업 모니터링을 통해 공연이 제대로 올라가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 그녀에게 보였다. ‘사업 내용을 좀 파악하고 컴플레인을 걸어라’, ‘국민들 세금으로 하는 건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는 대답이 나의 손가락을 찰싹찰싹 쳤다. 조금 더 버텼다간 손가락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 전화를 내려놓았다.
나도 세금을 내는 국민인데. 지원금을 받아 놀고먹는 게 아니라 일을 하는 건데. A씨에게 차마 전달하지 못한 말이 마음속을 맴돌다가 눈물이 되어 빠져나왔다. 엄마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엄마한테 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울음을 참아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차례 울음이 휩쓸고 간 얼굴을 보고 엄마가 물었다.
“얼굴이 왜 이리 상했어. 무슨 일 있어? 엄마한테 말해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친구 B는 작년에 대리를 달았다. 사촌 동생 C는 얼마 전 아기를 낳았다. 이번 공연으로 내가 버는 돈은 고작 40만 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나의 처지가 나를 더 무너지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