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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티서 Jun 10. 2020

그의 언어, 나의 시간

6월의 창작 주제 <언어>

6월의 작은 창작 활동은 '다른 작가의 문체를 따라 해보기'입니다. 읽으면서 제가 누구를 따라한 것인지 맞춰 보세용. :):)



 종태원 술 번개에서 잘 팔리는 강탑 같은 햇살이었다. 혹은 킴 카다시안의 숨겨진 애인같기도 했다. 쉽게 말해 실제로 집중해서 본 적은 없지만, 그냥 그럴듯한 날씨였다는 뜻이다. 


 날씨야 좋건 말건 나는 오늘도 사무실에 앉았다. 사무실살이가 개집살이라고 했던가. 주에 이틀 정도 회사 일에 집중하면 되는 근무 환경이 그리 나쁘지 않은 직장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이틀이 돌아오면 고역이었다. (그런 경험은 없지만) 돈 많은 중년의 추남과 사귀는 경우가 꼭 이와 같을 것이다. 돈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막상 결전의 그 날이 오면 오만 정이 다 떨어지곤 했다.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관계를 시작했으면서, 어느새 내가 돈 값하는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태도는 소름이 끼치기까지 했다. 


 망했다. 도저히 무협 만화 남자 주인공의 심리를 잠작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축지법을 익힌 것은 신상 루브탱 하이힐을 신은 것처럼 뿌듯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걸 자랑하고 싶어서라도 무림 출두를 하는 것이겠지? 무림을 일종의 다운타운으로 생각하니 좀 이해가 빨랐다. (헌데 하이힐은 내가 직접 신어봤더니 계단 한 칸 내려가기도 불편하던데 그걸 신고 싸운다고?) 아무튼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남자 주인공의 묵직한 성기에 대한 상상이었다. 묘하게 선이 여성스러운 남주의 얼굴과 그의 발기 씬이 주는 괴리가 내 뇌를 후려갈겼다.


 나는 예컨대 심란한 얼굴을 한 트랜스젠더다. 왜냐하면 나는 오늘따라 기분이 심란했기 때문이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부랴부랴 한 문학 웹진에 기고하는 글을 마무리하고, 무협 만화 한 편을 써 내고, 회사 동료들과 스터디 할 내용까지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게이라면 응당 스터디원 남자들의 외모를 평가해야 마땅했지만, 애석하게도 나 빼고는 남자가 1명 있는 스터디였다. 내 주변에 이리도 남자가 없다니. 순간 나는 공허한 애널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되었다. 쉽게 말해 하나도 아쉬울 것 없다는 소리다.           




 내가 어떤 소설가를 패러디했는지 눈치 챘는가? 힌트를 주자면 한국의 소설가고, 남성이다. 최근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학상을 탔고, 에세이집도 하나 쓴 것으로 알고 있다. 정답은 바로 박상영이다. 실제로 ‘(무슨)살이가 개집살이더라.’, ‘망했다.’, ‘심란한 얼굴을 한’, ‘(성기가) 묵직하다.’ 등은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겼다. 그의 문장은 나보다 훨씬 더 짧고 간결한 것 같은데,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며 패러디하다 보니 내 문장이 훨씬 더 길어졌다. 


 나는 박상영이 이뤄낸 성취들을 좋아한다. 그가 앞으로도 이런 소설들을 계속 쓰고 사람들도 그런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다. ‘캠프(camp)하기’, ‘의도적으로 외양에 집중하기’ 등 그의 작품에 관한 비평의 말도 (비록 그 의미를 완전히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그러니까 그는 이런 문체를 일부러 구사했다는 뜻일 것이다. 비평의 말들처럼 ‘그의 문장이 곧 게이들 본연의 말투’라는 식의 이해를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의외로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 이성애자 지인은 박상영이 ‘그들’의 삶을 가감 없이 보여줘 좋다고 말했다. 언제 ‘그들’의 삶을 시간을 들여서 본 적은 있는가? (뭔가 쿨해 보여서 가감 없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박상영의 문체를 빌려와 그의 화자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내 일과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출근하고, 일이 많아서 짜증나고, 날씨가 좋았는지는 잘 기억 안 나고. 꼭 이런 부분이 원나잇 하고 술 마시는 시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냥 말투와 내용을 좀 분리해보고 싶었다. 박상영식의 표현대로 사무실 생활에 대해 묘사하면 어때 보일까? 안 어울릴까, 과해보일까, 혹은 그건 그것대로 맛이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럴까. 뭐 이런 부분들을 실험해보고 싶었다.


 나는 박상영을 따라서 글을 써봤지만 그건 패러디이지 오마주는 아닌 것 같다. 그저 존경하는 마음만 가지고 그의 문체를 따라 하기에는 그와 내 입장이 서로 다른 부분이 또 많았다. 나는 상대가 게이라고 해도 남성 여럿과 함께 어울리는 게 불편해 종태원 술 번개에 나가본 적도 없고, 또 시스젠더도 아니다. 그래서 어떤 트랜스 젠더의 얼굴을 보고 ‘심란한’이라고 수식하거나, (남자인데) 묘하게 선이 여성스러워져서 인기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보면 좀 흠칫하게 된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확 이해되지만, 거기 완전히 동의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본문에서도 밝혔지만 킴 카다시안에게 숨겨진 애인이 있다는 것은 사실무근의 비유일 뿐이다. (박상영이 게이 인물에 패리스 힐튼 등의 별명을 붙인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 나 역시 게이 컬쳐 안에 속해 있으면서 그런 표현들에 익숙해지긴 했다. 하지만 현실 세계의 여자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런 유희 문화도 참 남성들끼리의 문화였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실제로 화려한 여성상을 좋아하는 것과 자신과 다른 성별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전혀 별개의 일이라는 걸 천천히 깨닫고 있는 중이다. 


 + 애널 운운까지 나오면 흔히 솔직한 게이 섹슈얼리티 표현의 최고봉처럼 치부되는 것 같다. 애널은 나에게 별로 특별할 것 없는 대상이다. ‘애널’하면 만화책에서 엑스자로 표시한 똥꼬부터 떠오른다. 남들이 짐작하듯 그렇게 섹시하지도, 더럽지도, 공허하지도 않은 것이다. 뭐 ‘똥꼬충’이나 ‘항문성교 중독’ 운운하는 치들은 너무 야해서 차라리 더러운 무엇처럼 여기는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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