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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롱박 Jun 13. 2020

'언어'라고 쓰고 '여행'이라고 읽자.

에세이 - 언어, 우당탕탕 여행에 대한

이것은 어떤 여행 이야기이다.


처음 혼자 갔던 일본 여행의 첫날은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여름이었다. 나의 목적지는 교토의 한 게스트하우스. 나는 오사카 공항에서 바로 교토로 갔다. 거기까진 쉬웠다. 영어 표지판을 따라 열차에 몸을 싣기만 하면 된다. 한 시간 남짓의 열차 여행 후 교토의 지하철역에서 올라왔다. 여기서 게스트하우스 까지는 버스로 15분. 제대로 된 버스만 타면 나는 해가 지기 전에 체크인을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갈 수 있다. 버스를 기다렸다. 자세히 기억은 안나지만 15번(?) 버스를 타면 될 일이었다. 잠시 후 버스가 왔고. 나는 그걸 홀랑 주워 탔다. 그러지 말지.


내가 예약했던 게스트하우스 / 로쿠로쿠 ROKUROKU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외국의 버스였다. 해외 여행에서 버스를 탄 적은 없었다. '내가, 가장 어렵다는 대중교통, 버스를 타고 있다니! 그야말로 로컬 여행이군!' 하며 들떠 있었다. 그런데 기분이 싸했다. 지도에서 본 나의 숙소는 교토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 버스는 자꾸 북쪽을 향한다. '어어? 이렇게 돌아서 가는 버스였던가?' 했지만, 나는 제대로 된 버스를 탔으니 그냥 실려 있기로 했다.


지나가는 풍경들, 사람들, 가까운 나라이긴 하지만 교토의 거리는 참 달랐다. 오래된 건물들이 나즈막하게 이어지는 거리. 차분한 길거리. 차도 별로 없고 차분한 분위기가 참 좋았다. 한참을 창에 매달려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한 두 명씩 내리고 해가 지고.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 아닌데. 나는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의 이름만 알고 있었다. 안내 방송이 나오면 내려야지 하고 있었는데 그 정류장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계속 앉아 있었다. 왜 그랬지? 그러지 말지. 어느새 버스에는 나와 기사님 뿐이었다.


아니, 그러면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해 보면 될 일 아닌가?

아니, 그러면 파파고같은 번역기를 써서 기사분께 위치를 확인해 보면 될 일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놀랍게도 스마트폰이 통용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의 그것은 비주얼을 선택하고 기능은 포기한 블랙베리. 덕분에 나는 그 어떤 문명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휴대폰의 배터리도 이미 탈탈 털려 있었다.


블랙베리 9000 / 예쁜 쓰레기! 예쓰!


버스는 점점 깊은 산속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주변은 온통 까맣고 가끔씩 나오는 건물들은 참 이상했다. 3, 4층 정도 되는 건물은 커다랗고 창이 많았다. 호텔 같기도 했고, 백화점 같기도 했다. 입구는 화려했고 한자로 쓰여진 간판이 붙었있었다. 간판에는 모두 같은 한자가 쓰여 있었는데, 그것이 온천을 뜻하는 温泉이었다는 것을 한자 까막눈인 나는 알 턱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교토 북동쪽의 온천마을로 들어가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걸까? 이미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왜 기사님께 물어볼 생각도 못했던 걸까? 아마도 내가 일본어를 못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기사님이 절대로 영어를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음속이 엉망진창인채로 나는 그 까만 산 속을 달려 결국 버스 차고지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아마 기사님은 그 전부터 이상했을 것이다. 여행용 가방을 든 여자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며 절대로 내리지 않고 차고지까지 왔으니, 귀신은 아닐까? 생각도 했을 것이다. 내가 무섭진 않았을까? 무표정으로 앉아서 차고지까지 따라온 여자 귀신. 말 한마디 않는 이상한 존재.


'그래도,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타고 있던 그 버스가, 결국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절망 또 절망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웃음이 난다더니 나는 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알 수 없는 일본어로 내게 다가오는 기사님을 보며 나는 웃었다. '기사님 미안합니다. 흐흐흐 이렇게 멍청한 여행자 보신적 있나요? 흐흐흐.' 라는 마음이 담긴 웃음 이었다.


기사님의 이야기는 이랬을 것이다.

"손님. 종점입니다. 여기가 목적지가 맞으신가요? 내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 했다. "저는 000에 가야 합니다. 저는 한국인 입니다. 저는 여행을 왔습니다." 물론 영어로. 기사님은 코리안 정도 밖에 못 알아들으셨고. 나는 게스트하우스의 주소가 쓰인 종이를 들이밀었다. "여기. 여기에 가야 합니다! 도와주세요."


기사님은 한참을 살피시더니 사무실로 종이를 들고 들어가셨다. 아니, 나를 경찰에 신고할 생각인가? 아니면 친한 야쿠자에게 전화해서 여기 멍청한 한국인 한마리를 구했으니 얼른 데려가서 싱싱한 장기를 취하라는 전화는 아닐까? 머리속으로 느와르를 한 편 찍고 호러 스릴러를 찍으려고 할 때 쯤 기사님이 돌아오셨다. 그리고 손으로 몸으로 그림으로 영어 단어들 몇개로 말한 내용은 이러했다.

"이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를 했다. 늦게 도착해도 체크인 할 수 있다. 여기서 기다렸다가 나가는 버스를 타라. 택시는 없다. 000정류장에 내려서 00번 버스를 타면 갈 수 있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라."


"아리가토우고자이마수."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일본어를 자신있게 외쳤다. 그리고 버스 차고지에 남겨졌다. 나는 버스를 잘못탔다. 그러니까, 같은 15번 버스지만 시내버스가 아닌 광역버스를 탄 것이었다. 나는 굳이굳이 광역버스를 주워타고 교토가 아닌 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까마득한 산 중이었다. 나는 무슨 깡으로 여기까지 실려왔을까? 올라온 길 아래로 듬성듬성 화려한 불들이 보였다. 저 대단한 불빛들은 다 뭘까? 나중에 그것들이 유명하고 비싼 온천이었다는 것을 알았을때, 그냥 미친척 저 곳들중 어디든 들어가 숙박하고 다음날 가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어야 했다.


다른 버스에 불이 켜지고 기사님이 내게 손짓했다. 나는 그 버스에 또 홀랑 탔다. "아리가토우고자이마수" 하면서. 버스는 출발하고 둘 밖에 없는 버스는 어색했다. 다행히 곧 몇명의 손님이 타고 도시의 풍경이 눈에 들어와 안심할 수 있었다. 돌아왔다 현실로. 유바바에게 이름을 팔고 센이 된 치히로처럼, 내 이름을 버리고 '쥬'- 같은 이름으로 온갖 신들의 목욕을 도와야 할 지도 모를일이었는데, 다행히 나는 현실로 돌아왔던 것이다. 물론 그게 다가 아니었지만.


기사님이 나를 불렀다. 대충 다음역에서 내리라는 이야기 같았다. 다음 정류장에 도착한 후 기사님은 아예 몸을 돌려 나를 보며 두 손으로 문쪽을 가리켰다. "아, 하이! 하이! 아리가토우고자이마수!" 하고 나는 내렸다. 아니 근데, 내린 여기는 또 어딘가. 정말 짜증난다. 끝나지 않는 밤이구나.


내가 내린 곳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몇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나는 빨리 숙소로 가고 싶었고 버스는 너무 오지 않았다.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비가 오기 시작했다. 거짓말 같지만 정말로. 대단한 밤.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그런 비였다. 나는 건물의 처마밑에 서 있었지만 무릎 너머까지 튀어 오르는 빗방울은 내 옷도 가방도 온통 적시고 있었다.


언제까지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릴 수 없었다. 계속 이러고 있다가는 가방속까지 다 젖을 것 같았다. 막무가내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일단 잡아 타고 게스트하우스 주소를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나 가는 차가 없었다. 차를 찾아서 길을 따라 걸었다. 비는 오고 나는 우산이 없고 그 흔한 편의점 하나 없고 가방은 젖어가고. 그냥 아무 집이나 두들겨서 주인에게 도움을 청할까, 골목의 가정집을 흘깃 거리며 살펴볼 정도였다. 몇번의 시도끝에 택시를 타고 나는 주소가 써진 종이를 기사님께 내밀었다. 하지만 안 될 년은 안 되는 법. 빗물에 번져 주소는 보이지 않았고 기사님은 도무지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일단 가보겠다는 듯 호기롭게 차는 출발했지만 비슷한 곳에서 계속 택시는 돌고 돌았다. 기사님도 나도 창밖을 살피며 게스트하우스 간판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난감한 나와 더 난감해 보이는 친절한 기사님.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는 기사님께 근처에 있는 호텔에 가자고 했다. 어디든 좋으니 지붕이 있는 따뜻한 곳에 들어가고 싶었다. 이제 돈은 문제가 안 된다. 나는 살아야 했다.


기사님은 나를 커다란 호텔 앞에 내려 주셨다.(호텔 헤이안노모리교토) 그리고 아주 짧은 영어로 내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혹시 방이 없다고 하면 나오세요. 다른 호텔로 가겠습니다." 후다닥 호텔 로비로 들어가서 숙박이 가능한지 물었다. 영어가 통하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홀딱 젖은 한국인은 처음 보셨는지 데스크의 직원은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방이 있었다. 체크인 하기로 했다. 나는 다시 나와 택시 기사님께 외쳤다. "히어! 호텔! 룸 다이죠부! 오케이 오케이! 아리가토우고자이마수!"


호텔은 대단히 좋은 곳은 아니었다. 비지니스 호텔보다 조금 더 좋은 컨디션의 방. 바삭한 침대보가 이렇게 감사할 수가. 거울 속엔 머리에 미역을 걸친 지친 인간이 서 있었다. '와. 이꼴을 보고도 택시기사님도 호텔직원도 내게 친절하게 대해 줬구나. 대단한 서비스 정신이다.' 싶었다.


다음날 날씨는 정말 좋았다. 공기도 하늘도 맑고 고운 날이었다. 밤새 말린 짐을 끌고 나오니 어제 본 그곳과 완전히 다른 동네였다. 고즈넉하고 정감가는 작은 동네. 지난 밤, 나를 삼킬것 같았던 그 곳이 아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본 게스트 하우스는 호텔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3일치 게스트하우스 숙박비를 하루 호텔비로 낸걸 생각하니 '조금만 더 진정하고 찾아볼 걸' 하는 맘이 들었지만, 됐다. 나는 어젯밤에 생존한 것 만으로도 된 것이다. 체크인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는 오후까지 잤다. 무슨 여행자가 이런가 싶지만 긴장이 풀린 몸뚱이는 잠이 고팠다.


호텔에서 게스트하우스까지 / 빨리 걸으면 5분인걸?


그 여행 이후 나는 히라가나와 카타가나를 외우고 일본 드라마와 영화에 일본어 자막과 한국어 자막을 동시에 올려 보기 시작했다. 다시는 말이 안 통하는 나라에서 길을 잃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수학은 죽어도 못하지만 언어는 금방 익히는 지독한 문과생이었던 나는 금세 일본어를 어느정도 듣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한자는 못 읽는다. 문맹이지만 말은 한다.) 그렇게, 정말 어렵지 않게(?) 나는 일본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 일본어를 해야하는 순간이 생긴다. 일본에 공연을 하러 갔을때가 그랬고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이 일본인 이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의 극단이 참여하는 연극 페스티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여행을 갈때는 말할 것도 없고. 그때마다 나의 일본어 실력은 큰 도움이 되곤 한다. 다들 묻는다 '어떻게 일본어를 배웠느냐'고. 그럼 '일본에여행갔다가버스를잘못타서온천마을에내렸는데거기서야쿠자한테장기를털릴뻔했다가친절한기사님을만나다시하산했는데다른버스를타려고기다리다가비가와서쫄딱젖어서너무무서운나머지택시를탔는데역시숙소를찾을수없어서비싼호텔에서비싼돈내고자고다음날게스트하우스가바로옆에있다는걸알고나서여행첫날죽을뻔한기억이생긴후에분하고억울해서드라마나영화를볼때자막을더블로보다보니일본어를하게되었습니다.'라고 설명하기 힘들어서 그냥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해서 보다 보니 하게 되었어요.' 라고 말한다.


다른 언어를 안다는 것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 언어가 아니고서는 완벽한 표현을 찾기 어려운 순간이 있다. '마음을 먹다'(한글)라는 표현과 '각오를 정하다'(일본어)는 같은 의미이지만 미묘-하게 느낌이 다르고 '모기에 찔렸다'(일본어)라는 표현을 쓰고 싶은 순간이 있으며 '꿈을 꿨다'(한글)보다는 '꿈을 봤다'(일본어)라는 표현이 더 와 닿는 날도 있으며 가끔은 '화장을 떨어트리다'(일본어)라는 표현을 쓰고 싶은 날도 있으니까.


그래서,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조금 더 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어떤 마음을 보여주는지.

마치 여행을 하듯이, 몰랐던 다른 것들을 더 보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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