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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만추 Jun 15. 2020

무너지는 시간

2)

무너진다. TV 속에서 건물이 무너지고 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지내는 사람들 몇몇이 거실에 모여 같은 장면을 보고 있었다. 일본어가 서툴렀던 나는 뉴스 내용의 반을 흘리고 반만 주워 담고 있었다. 일본어가 서툰 것도 있었겠지만 그날 유난히 정신이 없었다.     


정신이 없을 만도 하지. 그날 오후, 흔들리던 땅이 다시 잠잠해지자 모두들 일상으로 돌아가려 했다. 나도 일상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원래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퇴근하지만, 그날은 그럴 수 없었다. 지진이 일어난 후에는 가스를 사용할 수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점장님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지하철이 끊길 수 있으니 어서 집으로 가보라고 했다.       


우에노역으로 갔지만, 점장님 말대로 전철은 운행하지 않는 듯했다. 직원 두 명이 확성기를 들고 자신들을 따라오라고 했다. 그들을 따라간 곳은 우에노 공원이었다. 확성기로 무어라 말을 하는데 역시 나는 반만 알아듣고 반을 흘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 와서 지금껏 수많은 말을 흘려보냈지만 그때만큼은 글자 하나하나를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기에 애꿎은 두 손만 꽉 맞잡을 뿐이었다.      


공원에서 약 1시간 정도를 기다렸지만, 지하철은 다시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마음이 들었던 걸까. 나는 다짜고짜 걷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지하철 철도를 따라서 그리고 앞사람의 등을 지도 삼아 걷고 또 걸었다. 몇 년 뒤 일본 드라마를 보다가 ‘귀택 난민’이란 말을 알게 됐다. 그날 난 귀택 난민이었다.     


한참 동안 걷다가 찢어진 한 무리를 쫓아 옆으로 빠졌고, 그렇게 또 그들과 한참을 걷다가 몇 사람과 함께 또다시 옆으로 빠졌다. 하늘은 어느새 깜깜해져 있었다. 밤길을 걸으며 이 길이 맞기를, 이 골목 끝에 내가 아는 건물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 길이 우리 집으로 향하는 길이 맞아야만 했다.     


그렇게 2시간을 걸어 집에 도착한 나는 이 세상 정신이 아니었다. 너무 많이 굶었고 너무 많이 걸었고, 너무 많은 머리를 썼다. 탐정이 된 것마냥, 길가에서 위치를 알 수 있는 표지판은 죄다 읽어댔으니. 그토록 간절하게 일본어를 읽은 적은 처음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나는 마음이 풀렸고 마음이 풀린 만큼 입도 풀렸다. 살아서 다행이야. 이 말을 몇 번이고 했다.   

   

집에 도착한 뒤에도 여진은 계속됐다. 오후만큼은 아니지만, 땅이 계속 흔들렸다 잠잠해지기를 반복했다. 핸드폰에서 뿜어대는 재난 알림음은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내가 너무 무서워하자 미유키씨가 따뜻한 차를 끓여 주었다. 그때 꽤 친하게 지냈던 치아키씨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역사의 한가운데 있는 건데 무서워도 괜찮지 않아?” TV 속 건물뿐만 아니라 우리의 관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거실에서 마주치면 항상 반갑게 인사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는데, 마치 그랬던 과거가 꿈인 것처럼 우리 사이는 변해있었다. 치아키씨는 이 집에 사는 일본인 중 나에게 가장 먼저 다가와 준 사람이었기에 서운함이 더 컸다. 참다못한 내가, 나한테 뭐 화난 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게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며칠 동안 그와 나 사이에 아무 말 없이, 차가운 바람만이 불었다.     

 

“집 앞 가스토에서 차 한잔할래?” 치아키씨가 보낸 문자였다. 나는 좋다고 말하고 그와 함께 집 앞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갔다. 그는 커피를 마시고 나는 메론 소다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뭐가 화났는지. 나는 그래서 얼마나 서운했는지.      


“노만추가, 무섭다고 시끄럽게 호들갑 떨었었잖아?”

“호들갑?”

“응. 호들갑.”

“잠깐만 사전에서 뜻 좀 찾아볼게.”

“…”

“아! 호들갑! 아아! 맞아.”     


나와 그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그의 말을 듣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대화를 잠시 멈추고 일한사전을 찾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고르다가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또 잠시 멈추고 한일사전을 켜서 적당한 말을 찾았다. 우리의 말과 말 사이에는 조금 긴 쉼이 있었다.    

 

“내 전 여자 친구 동생은 지금 실종이 됐거든…”

그가 나에게 화난 이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지금 누군가는 가족을 잃고 슬퍼하고 있는데, 비교적 피해가 거의 없는 나는 무섭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으니 얼마나 미워 보였을까.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 하지만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진이 처음이고, 외국인이란 신분과 서툰 일본어는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사과를 하고 더듬거리며 나의 처지를 설명했다. 뉴스를 봐도 반밖에 알아들을 수 없는 내 심정을. 한국에서는 지진이 생소하고, 일본인처럼 지진에 대해 많은 교육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군다나 외국인이기에 누가 날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그래서 더욱 무섭고 공포스러운 지금을. 내 이야기를 들은 그는 놀라 있었다. 내가 호들갑을 떤 이유 또한 그가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나 보다.     


빨간색 전자사전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듣고 또 이야기했다. 우리의 대화는 빨간색 전자사전의 도움을 받아야 겨우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무렵엔 언어 따윈 상관없어졌다. 나와 그 사이에 세워져 있던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언어'라고 쓰고 '여행'이라고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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