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창작 주제 <언어>
단어 하나로 모든 설명이 끝나버리는 경우가 있다.
“왜 그랬대? 무슨 일이래? 그래서 누가 잘못한 거야?”
“왜 있잖아, 미친 전 여자친구(crazy ex-girlfriend).”
넷플릭스의 시리즈 <크레이지 엑스 걸프랜드>의 주인공은 바로 이 미친 전 여자친구다. 세상에 정말 전 남자에 집착하고, 자기파괴적으로 매달리고, 심지어 범죄까지 서슴지 않는 여자가 어디 존재하겠냐고?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정말 그런다. 그녀는 실제로 경계성 인격 장애라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그런 그녀의 입장에 주목한다. 밖에서 바라보고, “그러니까 너는 ‘미친 전 여자친구’인 거네.”라고 일단락 짓지 않는다. 드라마는 왜 그녀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게 과연 치료는 가능한 건지, 꼭 그녀의 문제가 그녀만의 탓이었는지(여기선 남자들도 다 한 개성씩 한다.), 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지 세세하게 살펴본다. 그러다 보면 처음엔 꽤나 급작스럽게 느껴졌던 그녀의 돌발행동들도 어느새 이해가 가능해진다. 나중엔 그녀가 꼭 더 건강한 삶을 살기를 진심을 다해 응원하게 된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면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라는 단어가 그렇게 나쁘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예전 같았으면 즉각적으로 스트레스를 유발할 이 단어가 그렇게 유해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꼭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그녀가 그 수많은 미친 짓들을 벌이며 불렀던 온갖 코믹한 노래들이 귓가에 떠오르기도 한다. ‘언어’를 다루는 이번 주엔 꼭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같은 희곡을 써 보자 다짐했다. 어떤 단어의 의미를 극적 정황을 통해 전혀 다른 것으로 바꾸는 희곡을 말이다.
이건 다른 경우인데, 글쓰기를 배우는 한 학원에서 <아이 필 프리티>라는 영화를 보도록 추천받았다. 주인공이 뚱뚱한 여자인데, 사이클을 타다 머리를 찧은 후로 자신이 예쁘다고 착각하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영화라나. 도무지 존경이 닿지 않는 교수자다. 그는 뭐 여자 주인공이 스트립쇼를 하는데 다른 남자들이 ‘우웩, 우웩.’ 토를 하긴 하지만 남자 주인공은 그런 그녀를 매력적으로 느낀다고 설명했다. 또 여자 주인공이 면접장에서 자신 있게 모델 포즈를 취하니까 그 당당함에 면접관들이 반해 면접에 합격하는 장면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찾아본 영화의 내용은 그와 전혀 달랐다. 딱히 그녀가 춤을 추는데 토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또 남자 주인공은 생각보다 훨씬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처음엔 비키니 대회에 나간 여자 주인공을 부끄러워하다가 주변의 반응이 좋으니 자신도 덩달아 뿌듯해 한다. 그녀가 난데없이 포즈를 취해서 면접에 합격한 것도 아니다. 그녀는 코스메틱 분야에 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의자에 내내 앉은 채로) 당당하게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는 그런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는 여성 조력자의 역할도 컸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공감을 겨냥한 이 영화가 순식간에 남성향의 화장실 코미디로 해석된 것이 놀라웠다. 물론 이 영화도 한계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꼭 영화의 만듦새만이 몰이해의 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뚱뚱한 여자가 나오니까 그 부분이 웃음 포인트라고 생각하고 웃는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내가 극 속에서 ‘뚱뚱한 여자’라는 관념을 어떻게 해석했는가와는 별개로 웃고 또 웃을 것이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랴 쿨하게 말해버리고 싶지만 또 남은 고민들이 밀려온다. 영화를 보던 통통한 여성들이 관극의 순간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상처받으면 어쩌지? (한 편으로 이미 여성의 몸매를 비웃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내가 너무 나약한 피해자로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보다 좀 더 직접적인 걱정으로는, 어떤 논쟁적인 장면을 넣으면 내가 빻은 창작자라는 결정적 증거를 제공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진짜 미친 전 여자친구보다는, 윤리적인 전 여자친구를 그리는 편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물론 조심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함께 공유하고 싶은 사람들이 누구였지? 우리는 종종 인격이 짧아 미친 짓을 해놓고 후회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상황을 오직 특정성별의 흠결로만 생각하지 않고 우리 모두의 문제라 공감할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통통한 여자에게 기회가 적게 돌아가는 상황에 부당함을 느끼고 그녀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물론 남자들도 딱 똑같은 정도의 차별을 받고 있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런 사람들이 내 극 속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힘을 얻기를 바란다. 그런 사람들의 수가 절대적인 소수라고 할지라도. 물론 <크레이지 엑스 걸프랜드>를 보고 ‘팩트폭행) 여자 창작자들도 인정한 여자들의 미친 짓’류의 리뷰를 남기는 시청자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무서워서 <아이 필 프리티> 속 주인공에게 겹겹의 옷을 입히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