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하지 않아, 아름다운 것들

by 하날빛

1.

내가 어렸을 적 필기구의 주류는 샤프보다는 연필이었다.


좁은 공간에 온갖 공책류와 필기구, 장난감류를 한데 모아놓은 세련되지 않은 문방구는 그야말로 보물 창고였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8개, 10개 들이의 연필세트를 고르는 것은 그 시절 가장 크나큰 낙 중에 하나였다.



연필깎이를 사용하기 전,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연필을 손으로 깎는 법부터 가르쳐 주셨다.


연필깎이는 얼마나 편했냐 하면, 연필을 구멍에 맞추어 넣고 돌돌 돌리면 나무가 결을 따라 고르고 일정한 얇기로 벗겨지며 그 안에 심이 반듯하게 깎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는 다르게, 내 손으로 깎는 연필은 어디가 모르게 서투르고 어설프기 이를 데 없었다.


왼손의 네 손가락으로는 여섯 면으로 각이 진 연필을 가볍게 가볍게 감싸 쥐고, 왼손과 오른손의 엄지 손가락을 위. 아래로 속삭이며 나무를 깎아가는 손놀림.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나에게 주는 왠지 모를 기분 좋음이 있었다.


뭉툭하게나마 존재를 드러낸 흑심을 뾰족하게 갈아내는 마지막 단계까지 거치고 나면 몇 미리가 줄어든, 그러나 다시 새로운 것이 된 연필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 연필깎이는, 닳아 없어진 것을 다시 되살린다는 것의 묘미를 주는 행동이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연필이 주는 매력보다 샤프나 볼펜의 편리함을 찾게 되다 보니 연필을 깎아본 기억이 오래전이다.


어른이 된 이후에는 기껏해야 눈썹을 꾸며주는 눈썹연필의 심이 닳아 드문드문하게 갈아본 것 외에는, 연필을 손에 잘 쥐지 않게 된 것 같다.


이미 나의 필체는 일정하게 뾰족함을 유지하는 Zebra라는 로고가 진하게 박힌 흰색 샤프나 제트스트림이라는 제법 고급스러운 검은색 볼펜에 최적화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나이가 들어가서인지 나무의 감촉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직 필기구는 연필이 전부인 열 살 딸아이의 필기구함에는 아직 깎이지 않은 새 연필들이 가득하다.


어느 날, 하나를 꺼내어 깎아보기로 한다.

그리고 여전히 서툰 연필깎이질을 시작했다.


꽁꽁 감추어진 심을 길게 빼기 위해 나무껍질을 깎는다.

날카로운 칼이 나무를 얇게 그리고 일정하게 밀어내도록 엄지 손가락에 힘을 실었다 뺐다가.


리듬과 강도 조절이 중요하구나.

얇게 패이기도 했다가, 깊게 파이기도 했다가.


어설픈 연필깎이다 보니 한결 한결, 울퉁불퉁한 결이 생긴다.


완전하지 않지만 오롯이 내가 만든 결.

그래서인가, 내가 깎은 연필에는 애정이 담기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





2.

다 깎은 연필을 보고 있자니 일정하지 않은 결이라고 흠잡을 법도 한데.


이상하다. 싫지가 않다.


못 생긴 연필에게서 부드럽게 밀려나는 나무껍질의 느낌이 떠오른다.


한결 한결 껍질이 벗겨지며 연필심이 나타날 때의 기쁨도 살아난다.


내 뭉툭한 엄지 손가락 두 개와 나무를 깎아내는 날카로운 도구가 리듬을 타며 이뤄낸 최고의 합작이 바로 이 연필이 아닌가.



마음이 가는 이유는, 완전한 결과물이어서만은 아니다.


내가 쏟은 마음, 내가 만든 리듬과 부드러움의 감각. 가공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연의 성질을 잃지 않은 사물과의 작은 접촉이 만든 온기.


깎이고 깎는 과정에서만 만날 수 있게 되는 이 모든 것이 연필에 대한 애틋함을 만들어 주었다.





3.

그러고 보니, 사람도 그러하다.


그 누군가를 완벽해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완전해서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사랑의 조건이었다면, 이 세상에서 그 누구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사람과 사람.

너와 나.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그 모든 인연 속에서는 완벽하지 않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나'를 깎아가는 순간들이 있다.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끌어안으며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나의 '너'가 흠결이 없어서도, 온전해서도, 부족함이 없어서도가 아니다.


오히려 미비하고 흠결 많고 허술하며 틈이 많은 우리 각자가, 서로를 위해 기꺼이 그 결을 깎아내어 갈 때 그 속에서 아련함이라는 것이 움트어 오는 것이다.


균일하지 않아도 온기가 스민 연필처럼.





세상에는 완전하지 않아 아름다운 것이 있다.


그중에 제일은.

그것은 너와 나, 우리 사이에서 그렇게 울퉁불퉁하게 생겨난 사랑.


불완전하나 완전한,

그 사랑이다.







* [하날빛의 글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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