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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안하나이하나 Mar 12. 2022

이별을 이겨내는 몇 가지 방법 2


 낮 기온이 10도까지 오를 정도로 며칠 사이 많이 따뜻해졌다. 곧 봄이 오려나보다. 고달픈 삶이지만 곧 다가올 봄과 함께 '왜' 사는가에 대한 고민이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희망으로 변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본다. 곧 봄이 올 거라... 믿어보자!


이별을 이겨내는 몇 가지 방법 (brunch.co.kr)



 

 2월 13일에 이 글을 쓰고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며칠 사이 급작스레 봄이 왔고 나는 다행히도 조금씩 '어떻게' 살 것인가, 희망에 가까운 고민을 하고 있다. 요즘은 라디오 대신 법륜스님의 즉문즉설로 빈 공간과 시간과 마음을 채우고 다.  


 스님의 즉문즉설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고민과 질문들을 다룬다. 카테고리만 봐도 자녀, 남편, 아내, 시댁, 부모, 직장/진로, 심리와 같이 매우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것들이다.


직장 생활이 너무 힘들어요.

꿈이 없어요.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서 자리를 잡았는데도 행복하지 않아요.

아이한테 화풀이하는 제 자신이 한심하고 속상해요.

남편의 외도 용서해야 할까요?

반복적인 삶이 지루해요.

아내의 성질을 받아주기가 힘듭니다.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 연락하고 싶어요.

운명의 상대가 있을까요?


심지어 점집에 가도 될까요? 교회도 가고 절에도 가도 되나요? 살 빼기가 힘들어요. 와 같은 고민과 질문들도 있다. ㅎㅎ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에서 스님이 전하는 핵심은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에서 지어내는 것'이니 마음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비워내고 관점을 긍정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몰라서 안 하나?' 할 테지만 신기하게도 이 진부한 이야기가 스님의 법문을 통해선 이전과 달리 보이고 새롭게 이해되기도 한다. 스님 특유의 재치와 입담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 종교인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던 틀을 깨는 파격적이고 명쾌한 답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건 바로 종교를 불문한 많은 사람들이 스님을 따르고 즉문즉설이 인기 있는 이유이기도 할 테다.  


 10년 전부터 쌓여온 고민과 질문들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그 고민들 사이에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고민들 또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스님의 답도 도움이 되지만 무엇보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걱정과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내가 부러워하는 환경과 조건에 있는 사람에게도 걱정과 고민이 있다는 것(지금은 결혼한 사람들이 부러운데 즉문즉설의 반 이상이 결혼 후 남편이나 아이 때문에 힘들다, 못살겠다는 고민이니 과연 결혼을 하는 게 맞는 걸까 싶은 생각도 든다 ㅎㅎ), 나만 이렇게 힘들고 외로운 게 아니라는 것, 어찌 보면 내 고민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는 것,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어떻게' 살지로 돌리게 된 것도 즉문즉설 영향이 컸다.


우리가 태어난 데에는 이유가 없어요.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 거죠. 이유가 없는 물음을 계속하다 보면 빈 공간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 삶의 무의미를 느껴서 극단적으로는 자살과 같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이유가 있기 이전에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 삶을 행복하게 살지 괴롭게 살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답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는 거예요.
스스로 괴롭히면서 살고 싶으면 괴롭게 살면 돼요.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지난 시간들은 괴롭고 힘들고 외로웠다. 상처 난 내 마음에 스스로 더 깊은 상처를 내는 시간들이었다. 고민이 계속될수록 무의미한 삶에 무기력해졌고 나는 변해갔지만 세상은 그대로였다. 죽고 싶은데 죽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죽지 못한 날, 펑펑 울고 나서야 생각했다. 죽지 못해 살아있어야 한다면 적어도 괴롭게 살고 싶진 않다고. 벼랑 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음을 좀 더 가볍게 갖고 회복하는 것뿐이었다. 스님 말씀대로 내게 주어진 삶이니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늙었든, 젊었든, 이혼을 했든, 결혼을 안 했든, 신체장애가 있든, 누구나 다.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행복은 '괴롭지 않은 거'에요.
여러분은 행복이 기분이 좋은 즐거운 상태라고 생각하지만
즐거움엔 반드시 괴로움이 따라다녀요.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으면 괴로움이 함께 오기 때문에 영원히 행복할 수 없어요.
지속 가능한 행복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 그게 행복이에요.   
 


 나는 요즘 이 '행복'에 대해서 생각 중이다. 서른아홉 인생에 돌아보면 행복으로 기억되는 순간이 참 많다.

대학을 1차 수시로 붙어 고3 마지막 학기를 수능도 보지 않고 통으로 쉬는 행운이 따라 행복했고, 필리핀에서 현지 튜터와 친구들을 사귀어 매일 다이내믹하게 놀았던 것도 재밌고 행복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혼자 국토대장정을 해냈을 때도 성취감을 느끼며 행복했고, 꿈꾸던 이집트 사막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쏟아질 듯한 별들을 볼 때도 눈물이 날만큼 행복했다. 베트남 고아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낸 2주도, 몇 년 뒤 아이들을 다시 찾아갔을 때 내 사진을 들고 와 나를 기억해줬을 때도 고맙고 행복했다. 7년간 가슴에 품고 있던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의 비현실적인 풍경 속에서도 너무나 행복했고, 돌아와서 개인 사진전을 열었을 때도 꿈을 이뤄 행복했다. 멕시코 칸쿤 호텔에서 all inclusive의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행복했고 방콕의 재즈바에서 색소폰 연주를 들을 때도 행복했다. 스페인 말라가의 아름다운 해변에서도, 세비야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보면서도, 그라나다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야경을 보며 거리의 악사가 들려주는 로망스 기타 연주를 들었을 때도 행복했다. 일본 여행을 하며 맛있는 술과 음식을 먹고, 눈이 오던 날 노천 온천에서 시원한 맥주와 함께 책을 읽던 행복도 빼놓을 수 없다. 제주도에서 벨롱장에 나가 직접 만든 잼을 팔던 때의 재미도 행복이었고 월정리와 옹포리에서 매일 푸른 바다를 보며 2주 살기를 했을 때도 행복했다. 무엇보다 짧은 청춘을 놓치지 않고 자유를 만끽하며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나를 지지해주고 믿어준 엄마 아빠가 있어 행복했다.  


죽고 싶었던 내 삶은 행복한 순간이 이렇게나 많은 감사한 삶이었다. 단순히 괴롭지 않은 상태를 넘어 가슴이 벅찰 정도로 기분이 좋고 감사한 때가 많았으니 이것은 즐거움에 더 가까웠고 그래서 내 인생엔 즐거움만큼이나 괴로움도 크고 깊게 왔던 게 아닐까 싶다. 크나큰 즐거움을 맛보았으니 크나큰 괴로움도 감내해야 할 나의 몫이었다.



모든 괴로움은 욕심에서 비롯돼요. 그러니 욕심을 버리세요.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데 책임을 지지 않으려니 괴롭죠.
선택을 했으면 책임을 지세요. 받아들이세요.



 생각해보면 나의 이별 또한 스님 말씀대로 욕심과 책임과 결부된 문제였던 것 같다. 내가 만들어 놓은 그 사람에 대한 환상, 실제로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나는 관계가 삐그덕 거릴 때마다 내 환상에 그를 욱여넣었다. 결국 그게 내 욕심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 이별이 왔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었고 내가 선택한 이별이었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마땅한데 비겁하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어떤 날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며 탓했고, 어떤 날은 그 사람을 원망하며 그리워했다. 그럴수록 상처받고 아픈 건 결국 나 자신이었다.


스님 말씀을 매일 같이 들으며 이별 후 지금 이 시간이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물론 나는 아직 쌓은 공덕이 적어 오늘과 내일의 마음이 다르고 또다시 흔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 말씀은 나의 중심을 잡아주는 큰 힘이 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는다.


 2주 전부터 매일 아침 108배를 하고 있다. 나의 개인적인 소원과 희망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108개의 번뇌에 대한 참회와 감사와 발원에 대한 기도를 하며 절을 한다. 어떤 날은 잡념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온 마음을 다해 기도 문구를 외는 반면 또 어떤 날은 눈물을 뚝뚝 떨굴 정도로 감정에 북받치기도 한다. 그간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너무 힘들게 괴롭힌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에 쏟는 눈물이다.


 누구나 겪는 이별이지만 이별 당사자에겐 항상 본인의 이별이 가장 아프다. 아픔의 크기가 얼마인 지간에 가장 중요한 건 그 이별 안에서 나의 중심을 지켜내는 일이란 걸, 이번 경험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는다. 서른아홉에서야 그걸 알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이전 경험치가 있더라도 매번 처음 하는 사랑처럼 최선을 다하고 처음 하는 이별처럼 아파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 바로 나니까... 마흔이 넘어서도 또다시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 흔들리고 휘청댈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나의 중심만은 잃지 않고 굳건히 지켜냈으면 좋겠다. 나뿐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그러했으면 좋겠다.


법륜스님 말씀대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인생의 희망이 되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모두는!



이별을 이겨내는 몇 가지 방법 보기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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