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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남이 Aug 30. 2021

옛 자취를 찾아서, 사적 이성산성

하남시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미사리 선사유적지부터 조선 시대 향교까지 수많은 유적지가 있는 역사·문화도시다.

그중에서도 이성산성은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해발 209.8m의 이성산 정상에서 남쪽으로는 계곡을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북쪽을 바라보면 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성산성.

이번 가을은 역사적인 의의가 담긴 이곳에서 우리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면 어떨까.

축조 시기를 뒷받침하는 기록들


이성산성에 대한 직접적인 역사 기록은 1862년 《중정남한지》와 1860년대 《대동지지》에서 확인되며 대체로 백제의 옛 도읍으로 주장하는 기록들이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백제의 첫 도읍지를 한강 유역의 송파구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으로 보고 있지만, 과거 고고학적 자료가 확보되기 전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주장되었다. 그중 하나가 이성산성을 포함하는 춘궁동 일대를 삼국사기 기록에 등장하는 백제 하남위례성으로 보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는 백제 왕도인 풍납토성, 몽촌토성이 이성산성에서 불과 5㎞ 거리에 있고, 미사리에서 백제 마을 유적이 나왔다는 점, 조선 시대 정약용의 《강역고》, 홍경모의 《중정남한지》에서 이성산성을 백제가 쌓은 성이라고 소개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정약용은 백제의 하남위례성을 춘궁동 일대로 봤으며, 홍경모는 이성산성을 온조의 고성으로 지목하고 왕궁은 광주의 고읍인 궁촌에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일제시대의 사학자인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춘궁리 일대를 백제의 도읍지로 보고 이성산성을 ‘삼국사기’ 개로왕조의 북성으로, 남한산성을 남성으로 보았다.


이성산성의 축조 시기와 주체에 대한 의견은 모두 조선 시대 중기 이후의 문헌 기록이나 주변의 정황으로 추정한다는 점에서 근거가 미약하나 군사 행정의 긴밀하고도 전략적인 요충지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성산성은 지리적 위치나 성의 축조 방식의 정교함을 볼 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성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아울러 한강 물길을 통해 여객이나 화물을 실어 나르는 것이 용이하고 중부 내륙 지방으로 가는 주요 육상 교통로를 통제하면 배후에 남한산성이 있어 방어하기 좋은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삼국 시대의 유서 깊은 대표 유적지


이성산성은 209.8m에 S자 모양의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성돌은 대부분 화강편마암이고 높이는 4~5m, 전체 둘레가 1925m에 달하며 내부 면적은 15만 5025㎡(약 4만 7000여 평)로 삼국시대 산성 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따르면 이성산성은 총 2차례에 걸쳐 쌓았다. 외벽의 기울기는 거의 85도로 수직에 가깝게 쌓았다. 1차로는 이성산성 일대의 기반암인 흑운모 편마암을 이용해 쌓았다. 내벽과 외벽을 동시에 쌓아 올려 단면이 사다리꼴이다. 성벽 내부는 겉면에 비해 세장한 할석을 사용했고 지대석을 사용하지 않았다. 1차 성벽이 일부 무너지고 난 후 2차로 쌓은 성벽은 60~90cm 크기의 대형 지대석을 놓고 쌓았다. 지대석 위로는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해 보통 옥수수 모양 성돌이라고 부르는 화강암제 성돌을 이용해 들여 쌓았다.


성벽과 저수지 건물 터 등을 살펴보면 축조의 차이가 확연하게 보이며 출토 유물의 시기를 추측하여 7세기 후반쯤 큰 개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성산성은 성내에는 평면적이 80평 정도의 대형 장방형 건물 4개소를 포함하여 20여 개(8각, 9각, 12각 건물지)에 달하는 대규모 건물지가 남아 있다. 


이중 동서로 대칭을 이루는 9각 건물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壇)으로, 8각 건물은 토지 신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으로 초기 백제 시대의 왕과 유서 깊은 대표적인 유적지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장방형 건물 위주에 8각, 9각, 12각 등 다각형 건물들이 구축되면서 이성산성의 기능도 전략적인 군사 요충지의 기능 외에도 행정적, 문화적인 기능이 강화되어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성산성에서는 2개의 저수지가 확인되었는데, 저수지에서는 전국적으로 출토 사례가 그리 많지 않은 ‘목간’이 출토되었고 간지명 ‘무진’(608년으로 보는 의견이 일반적임)이 쓰여 있어 저수지를 만들고 사용했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저수지 등 습지 유구에서는 유기물이 오랜 기간 잔존하는데, 이성산성 저수지에서한눈 는 목간뿐 아니라 허리에 차는 작은 북인 ‘요고’ 등 유기물로 이루어진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성벽과 저수지, 장방형 건물터 등을 보면서 개축한 흔적과 축성 기술의 변화를 추정할 수 있다고 하니 역사적 흔적이 가득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자연 속에서 느낄 수 있는 하남의 역사


이성산성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북쪽 방향으로 내려오는 줄기와 만나 길게 맥을 형성하는 금암산 줄기에 접해 있다. 남쪽은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이 있으나 북쪽은 작은 구릉만 있어 한강 주변을 저수지에서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배후의 평야 지역을 방어하고 강북으로부터 한강 유역을 침입하려는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입지여서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런 역사적인 흔적이 가득한 곳, 이성산성을 지키고자 하남시는 매년 이성산성 문화축제를 개최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코로나 시대 많은 문화예술 행사들이 축소되고 있으나 하남 시민들과 예술 단체에서는 이미 몇 해 전부터 둘레길을 중심으로 야외 전시와 시화전, 나무에 이름 달아주기 등을 진행하고 있다. 작년에는 코로나19 확산 차단을 위해 온라인으로 기획해 시민들이 안전하게 집에서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자연 속에서 산새와 바람 소리를 들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성산성 둘레길을 걷다 보면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장방형 건물지와 저수지 등을 지나 이성산성 정상에 오르면 왜 이곳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어느새 역사·문화도시 하남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들게 된다.

이성산성 경관광장 조성


이성산성 관련 보수 정비는 2003년 이후 9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2010년 이전까지 남벽과 동문지를 중심으로 정비가 이루어졌으며, 이후에는 탐방로, 배수시설, 주차장 등의 관람 편의 시설이 주로 정비되었다. 올해는 이성산성 내 안내판을 전면 교체하고 향후에는 2016년과 2020년에 확인한 이성산성 서문지를 복원할 계획이다. 


특히 하남시는 이성산성 주변 2만 1393㎡를 활용해 역사길, 광장 및 쉼터, 주차장 등을 갖춘 경관광장을 조성했다. 이는 문화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시민들에게 편익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도시계획시설 결정 이후 무려 15년 만에 완공된 것인데, 문화재 발굴 작업 등에 장시간이 소요 됐기 때문이다.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하남역사박물관과 한양대학교 박물관에서 관람할 수 있으며, 하남역사박물관에서는 이성산성을 주제로 한 실감형 콘텐츠를 체험할 수 있다.

<9각 건물 추정 복원도>출처: 하남 이성산성 3차 발굴 조사 보고서(1990)
<장방형 건물 추정 복원도>출처: 하남 이성산성 3차 발굴 조사 보고서(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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