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영화 <버드맨>을 보고

by 하난

버드맨은 시즌 3까지 제법 흥행한 작품이었다. 리건은 버드맨으로서 엄청난 유명세와 인기를 누렸고, 이제는 버드맨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꿈을 심어준 한 작가의 작품을 리메이크해 연극을 하기로 한다. 그는 ‘저질스런’ 대중문화에서 멀어져 하나의 ‘예술’을 하는 ‘예술가’가 되길 고대한다. 그러나 감독으로서의 그의 자질이 부족했던 탓일까, 연극은 쉽게 진행되지 않는다. 연기 재능이 없는 건지, 연기가 하기 싫은 건지, 뻣뻣한 연기만 해대던 주연배우를 리건이 염력을 써 없앴음에도, 그 다음에 온 흥행수표라는 마이크는 제멋대로다. 아무리 프리뷰라고는 하지만, 연극 도중 갑자기 대본과는 전혀 다른 대사를 치며 소품들을 엎고 “이건 다 거짓이다. 이 바나나도 가짜다.”는 망말을 내뱉는다. 그런 와중에 자신과 잠자리를 가졌던 여배우는 임신을 했다고 하고, 마약을 해서 재활원에 갔던 딸은 다시 대마초를 피운다. 뭐 하나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의 연속. 심지어 뉴욕타임즈의 비평가는 그의 공연을 보지도 않은 채 그가 싫다는 이유로 사상 최악의 비평을 쓰겠다며 그를 위협한다. 리건은 계속해서 들려오던 환청, 버드맨의 속삭임에 응하기로 한다. 다시 버드맨이 되어 날아오르기로 결심한다. 그는 건물에 오르고 반짝이는 세상을 배경으로 날아오른다. 그의 비행을 끝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리메이크작은 사실 이 이후에 다른 이야기가 있었지만, 나는 이 영화의 종결은 여기여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여기까지를 버드맨으로 보도록 하겠다.)

버드맨은 흔들리는 카메라 무빙과 이어지는 드럼 소리, 짤그랑 울리는 쇠소리가 특징적이다. 전반적으로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와 등장인물의 빠른 말소리는 정신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버드맨은 이를 바탕으로 긴장감과 불안함을 자아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초능력이 있다고 믿었던, 버드맨에 자신을 투영해, 리건이 아닌 ‘버드맨’이 되어버린 한 남자의 심정에 동화된다. 극중 그의 대사처럼 나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무엇을 보고 이해한건지 인지하기도 전에 다음 장면이 이어지고, 계속되는 흔들림과 둔탁한 소리, 날이 선 소음은 단전 아래에서 가슴을 조이며 목을 턱, 친다. 살짝 숨쉬기가 힘들고 몸이 굳는다. 그 상태로 계속해서 리건의 움직임을 쫓는다. 그의 자글한 눈과 무언가를 향하는 듯한 눈동자, 제법 벗겨진 머리, 아닌 듯 단단한 몸을 계속해서 응시한다. 그렇게 버드맨은 시청자를 빠져들게 한다.

여기서 먼저, 리건이 원 배우 대신 극에 출연시킨 배우, 마이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마이크는 리건과 퍽 다른 인상을 자아낸다. 자유롭고 대중문화에 익숙하며, 약간은 방탕한 듯한 얄미운 인상의 마이크. 반면 리건은 차분한 인상에 어딘가, 그러니까 그가 좇는 소위 ‘예술’이라는 것에 매어 딱딱하다. 때문인지-사실 마이크가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농후하지만- 두 사람은 자주 싸운다. 처음부터 마이크의 도발로 말싸움을 하고, 이후에는 몸싸움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이토록 다른 두 사람이, 내 눈에는 같게 보였다. 마이크는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그는 끊임없이 무대에서의 ‘진실’을 추구하며, 무대에서 실제로 성관계를 맺으려 하고, 실제가 아니라며 난동을 부린다. 그게 꼭 무대에서만 진실할 수 있는 겁쟁이 같았다. 누구보다 진실을 원하지만, 그 솔직함을 도저히 가질 수 없어 하는 발버둥 같았다. 그에게는 삶에 대한 용기가 없었다.

리건은 또 어떠한가. 그는 아내가 자신의 작품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칼을 던지고, 연극에 몰두해 딸은 소외시킨다. 계속해서 흥행했던 날, 버드맨으로서의 삶에 매어 그의 속삭임을 듣고, 괴로워하다 결국 버드맨이 되기로 결심해 아무런 안전장치 없는 높은 건물 위에서 뛰어내린다. 그도 무대의 삶에 자신의 삶을 빼앗겼다. 무엇이 진실인지, 어디에 자신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채로.

<버드맨>은 배우의 삶을 그린다. 역에 몰입한 나머지 자신을 빼앗겨버린 배우의 삶. 그런데 동시에, 모든 사람의 삶을 그린다. 과거의 어떤 것으로든 잘난 적이 있었던 자신을 그리며 아쉬워하고, 그날의 영광만을 고대하는 누군가들의 삶. 이 삶의 비참한 점은, 비교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비교를 하는 과정에서 열등감과 자격지심, 부끄러움을 얻고는 한다. 어느정도는 도움이 되고 성장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자기 자신이 붕괴되는 듯한 괴로움에 살기위해 상대를 비난하고 탓한다. 깎아내리고 위안을 얻는다. 그런데 그 비교의 대상이 자신이라면 어떨까. 비난할 수 없고, 미워할지라도 결국 그건 ‘나’를 미워하는 것에 그친다. 때문에 나는 그리 생각한다. 가장 비참한 비교는 자신과의 비교라고.

버드맨에서 중점 이야기가 되는 리건의 연극은 ‘사랑’을 주제로 삼는데, 한참을 고민했다. 이 이야기에서 왜 하필 가장 중요한 연극의 주제가 사랑일까. 사실, 당연하다. 사람의 이야기, 그 사람의 비참함과 발버둥을 그리는데 사랑이 빠질 수 있을리가. 연극에서 그는 말한다.

“왜 나는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 하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삶이 그러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비평가들이, 예술가들이 자신을 사랑해 주길 바라며 끊임없이 매달리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을 사랑했던 이들이 멀어진다. 때문에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사랑을 구걸해야 하는 모순에 빠져, 어디에 속해야 할지 몰라 한다. 꼭 우리의 이야기 같지 않은가.

각설하고. 영화에서 인상깊었던 장면이 있다. 예술성을 이야기하는 리건에게 그의 딸이 어떻게 대중을 보지 않고, 트위터, 페이스북을 하지 않고 이야기를 만들 수 있냐고. 당신이 하는 그 이야기는 저 옛날 백인 귀족들에게나 먹히는 이야기라고. 현실을 보라고.
이 대사는 극을 보지도 않고 비평을 쓰는 비평가와 겹쳐져 나를 돌아보게 한다.

이야기를 사랑한다고 해놓고, 무언가를 이리저리 끄적이면서, 나는 도대체 무얼 보고 있는 걸까. 고리타분한 책에나 빠져 현실의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에는 무감한 나는, 얼마나 모순적이며 무책임한가.

결국 이야기는 사람을 담는다. 사람을 담는 이야기를 쓰겠다며 날뛰면서 막상 그들을 보지 않는다면, 그들이 쓴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저 리건이 대중문화를 경멸하고, 비평가가 리건을 경멸했듯 이루어지는 낙인과 혐오의 연속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써야 할까. 잘 아는 것도 없고, 글쓰기 전문가도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보고, 듣고, 생각한 대로 가감없이 적는 것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멋없고 구질구질해보일지라도, 사실 그만큼 멋있는 글쓰기는 또 없을 테니.

과거를 사랑한 나머지 과거에 먹혀버린 사람들을 떠올리며, 부디 그들이 조금이라도 현재의 자신을 사랑해주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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