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우물

홍은전의 <그냥, 사람>을 읽고

by 하난

"굴욕은 남이 나를 업신여기는 순간이 아니라 내가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자각할 때 찾아온다. 인간의 혐오는 제 몫의 굴욕을 남에게 돌리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굴욕부터 배워야 한다"
- 홍은전, <그냥, 사람> 중 -

홍은전은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활동했다. 처음부터 장애인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 간 야학에서 집회 참여를 요구받았고, 어쩌다 본 집회영상에서 가장 앞서 시위를 하는 야학 교장을 봤을 뿐이다. 그 우연적인 호기심과 감동이 그녀를 야학으로, 이 책으로 이끌었다.

<그냥, 사람>은 소외된 존재를 그린다. 세월호 희생자 및 유가족, 장애인, 가축 등 우리의 시선에서 빗겨나간 존재들을 이야기한다. -후반부는 특히 가축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제목이 '그냥, 동물'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긴 한데, 또 그렇게 하면 '그냥, 사람'만큼의 뭉클한 느낌이 없다는 점에서 납득과 동시에 이것조차도 인간중심적으로 감각하는 나에 대한 착찹함을 느낀다.- 홍은전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자신이 취재했던, 혹은 마주했던 존재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해 화재에 타 죽은 한 청년의 이야기, 장애를 가진 자식을 시설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부모의 이야기, 어느 날 홍은전의 집에 찾아온 작은 생명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들을 통해 홍은전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이게 옳은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처음에는 계속해서 장애인의 탈시설과 자유를 주창하는 그녀가 아니꼽게 보였다. 과도하게 이상주의자 같았던 탓이다. 장애인도 자유롭게 이동하고, 직업을 가지고, 하고싶은 거 하면서 사는 세상. 나도 바란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혼자서 밥 먹는 것조차 힘든 많은 장애인들에게는 활동보조원이 필요하고, 그것마저도 한 비장애인이 한 명의 장애인을 돌보기는 어렵다. 한 장애인의 탈시설화를 위해서는 다수의 비장애인 활동보조원이 필요하다. 현실에서, 그 인력은 어떻게 확보할 것이며 자금은 또 어떻게 마련하는가. 별다른 구체적 해결책 없이 무작정 탈시설화를 이야기하는 건, 구체적으로 시설에서 장애인들을 보조하는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제법 상당한 불편함을 안고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 문득, 내가 굉장히 웃긴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다른 무수한 글에서 '질문'의 중요성을 논해놓고, 지금 답 없이 질문한다고 욕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 글의 첫 부분에 적힌 문구처럼, 나는 나의 굴욕을 저자에 대한 혐오로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에서 답을 찾기란 어렵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질문과 문제제기를 멈추는 순간, 불편함을 포기하는 그날, 사회의 문제들은 온전한 '불가결'의 문제가 되어버릴 뿐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가 들어가며 쓴 글이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 무대에서 "장애등급제를 폐지하라!"하고 외치면 그 구호를 따라하면서도 속으론 '정말 그런 세상이 올까?' 생각했다. 장애등급제라는 보이지 않는 제도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지에 대해서는 아주 생생하게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나는 장애등급제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라고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 때문에 나는 내가 활동가로서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늘 생각해왔다.
-홍은전, <그냥, 사람> 중-

그랬던 그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글을 쓴 건 한 강연을 본 후였다. 역사에 정통한 강연자는 지리를 바탕으로 해당 지역의 역사, 그 역사의 고통, 피해자들, 아픔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얼마전 세워진 한 건물을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에는 오직 건물이 얼마나 문화적, 경제적 가치가 있는지 뿐이었다.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소외된 이들은 누락되는 강연을 본 홍은전은 충격받는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그의 세계를 몰랐으니 그도 나의 세계를 모르는 게 공평하다고. 그러니까 인간은 모두 각자의 우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세상은 그런 우물들의 총합일 뿐이라고. 더 거대하고 더 유구한 우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다른 우물들이 있을 뿐이라고. 그날 나는 나의 우물을 처음으로 바라보았다.
-홍은전, <그냥, 사람> 중-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나도 그녀와 퍽 유사한 생각을 하며 살아왔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내 우물이 작다고 여겼다. 세상 물정 모르고, 아는 것도 제대로 없는, 배움에 한참 먼 사람. 때문에 늘 궁구하고 고민하고 받아들여서 지평을 늘려야하는 사람. 그게 내가 보는 '나'였다. 늘 더 넓고 거대한 우물을 그리워했고, 찾아헤맸다. '아직' 준비가 덜 돼서, '아직' 어려서, '아직' 모자라서 무엇도 말할 수 없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사실 그저 겁쟁이의 변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소리내 비난받는 게 싫어서, 어리고 무구한 채로 있으면 어디서든 포용될 것 같아서 애매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나의 세계관은 세워져 있다는 걸.

이제는 그 세계를 보려고 한다. 학생들과 정신질환자, 성소수자와 강아지들로 채워진 그 세상을. 이제는 그곳을 파헤쳐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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