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거인>을 보고
에렌의 세상은 세 개의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점이 같은, 그러나 반지름이 다른 원들은 가장 작은 원부터 각각 월 시나, 월 로제, 월 마리아라 불린다. 그것들이 에렌의 세상을 둘러싼 세 개의 벽이다.
세상은 거인에게 지배당했다. 어느 날 출현한 거인들의 습격에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간다. 끝에 몰린 인류는 거인을 막을 세 개의 벽을 세우고, 그 안 속에서 생을 영위한다. 에렌이 사는 곳은 월 마리아로, 가장 위협에 취약한 곳이다. 그러나 휴전 상태인 한국과 마찬가지로, 월 마리아도 듣기와 달리 제법 평화롭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상점이 열리며 사람들은 웃고, 싸우고, 떠든다. 하지만 에렌은 그런 일상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친구, 아르민이 가져온 바깥 세상에 대한 책을 보며 에렌과 아르민은 벽 밖의 세상을 꿈꾼다. 드넓은 초원, 살랑이는 바람결과 온통 푸른 바다. 그건 아이들이 꿈꾼 ‘자유’라는 이름의 세상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사람들이 여전히 싸우고, 떠들며, 울고, 웃었던 날이었다. 불행은 발 뻗고 잘 때쯤 온댔던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초대형 거인은 갑작스런 등장과 함께 너무도 가볍게 월 마리아를 파괴했다. 벽이 파괴되며 몰려온 거인들은 포식을 이어갔다. 집을 뭉개고, 안에 든 사람을 꺼내어 씹고, 찢었다. 기이하게 돌아가는 눈동자와 인간과 똑닮은 거대한 몸뚱어리가 학살을 시작했다. 에렌의 엄마는 거기서 죽었다. 무너진 집에 깔려, 도망갈 틈도 없이 거인의 식사가 되었다.
평소 친분이 있는 아저씨의 도움으로 월 로제 안으로 도피했으나, 에렌은 그날의 공포와 분노를 잊지 못했다. 자유에 대한 갈망과 복수에 대한 집념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는 거인에 대해 조사하는 조사병단에 입단한다. 그리고 수년이 지나 다시 시작되는 학살과 그에 대한 저항, 그 과정에서 밝혀지는 잔혹한 진실들.
이건, 학살당한 인류의 반란이자 인류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진격의 거인>은 그 명성에 걸맞게 우선 ‘재밌다.’ 문명이 발전하기 이전의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거인’이라는 소재로 인해 발전한 전투술과 기술은 빠르고 격정적인 전투신을 가능하게 해 계속해서 이어지는 전투에 집중하도록 한다. 입체기동장치를 활용해 각 벽을 타 넘고 거인의 목을 노리는 스피디한 움직임을 보노라면 꼭 하늘을 나는 것만 같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건물들, 찰나로 추락하는 동료들의 모습, 튀어오르는 누군가의 기합과 거대한 손에 잡힌 친구의 비명. 끔찍한 장면들과 자극적인 요소로 우리는 더욱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밝혀지는 진실과 인물들의 예기치 못한 언행은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청자를 고민하게 한다. 무엇이 진실인가. 누가 거짓을 고하는가.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품은 자유를, 사랑을, 삶을, 의미를 묻는다. 라이너의 해리성 인격장애를 보여줌으로써 준비되지 않은 이해는 자해임을, 그저 선선한 공기를 쐬는 것의 즐거움을 논하는 아르민의 대사에서 의미없음의 의미있음을, 유미르의 서사를 통해 ‘나다움’의 의미를, 왜곡된 역사를 통해 진실의 불확실성을 이야기한다.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짓밟혀 죽는 가비의 친구를 통해 전쟁이라는 현실을 보고, 같은 절망 앞에서 일종의 ‘자신’에 해당하는 에르디아인을 죽이기로, 즉 자살하기로 결심하는 지크와 섬 이외의 사람들을 몰살시키기로, 타살하기로 결심하는 에렌의 대비를 통해 결국 누군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잔인함을 목도한다. 그외에도 논할 것은 많지만 특히 작품의 주된 주제인 ‘자유’에 대해 먼저 논해보고 싶다.
에렌에게 자유는 존재했는가. 아니, 우리에게 자유란 존재하는가. 에렌이 시조의 거인을 통해 과거과 현재, 미래에 구속되었듯 우리도 유전자에 의해, 가족에 의해, 국가에 의해, 문화에 의해, 저 자신의 과거에 의해 묶여 사는 존재이다. 어떤 교육을 받았으냐부터 어떤 말을 들었느냐, 어떤 걸 만지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나약한 존재들에게 ‘자유’란 허용되는 것인가.
이전의 글에서도 말했듯, 그 커다란 굴레 안에서나마 존재하는 미동의 순간들이 우리가 자유임을 나타낸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그러나 작품을 보는 내내 다시 한번 의문이 든다. 그것마저도 비자유에 의한 좌절을 두려워한 한 인간의 우스운 자기위로가 아닐까.
특히 이 의문점은 마지막 장면, ‘자유의 노예’가 된 에렌을 통해 극대화된다. 우리는 누구나 무언가를 바란다.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고, 어떤 것을 통해 살아간다. 그것은 사랑일수도, 명예일수도, 자유일수도 있다. 지크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어떤 것의 노예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자유는 진정 자유로 남을 수 있는가. 자유라는 이름의 비자유를 부유하는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문득, 사르트르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자유’다. 그러나 ‘자유롭기’를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하다면, 우리는 자유로운가.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는가.
자유에 대한 논의만큼, 작품을 통해 강렬히 고민하게 되는 부분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이다. 에르디아인은 수천년간 비윤리적으로 군림했던 죄로 만인의 질타를 받으며 억압당한다. 에르디아인은 ‘과거’에 죄를 지었기에 그들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 되고, 그들의 고통은 마땅한 것이 된다. 지금도 우리는 연좌제를 비난하며, 책임을 강요한다. 사실, 다들 혼란스러워하는 거다. 연좌제는 부당함을 아는데, 연좌제를 묻지 않기에는 우리 모두가 과거의 망령으로 인해 살아갈 수 있기에, 그들의 위에 서 있기에, 그들과 단절될 수가 없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과거의 영광을 누리는 이들이 과거의 죄를 잊는 것은 ‘부당해’ 보인다.
혼란스러움은 한 가지 질문을 통해 더해진다. 에렌은 결국 자신의 친구들을 위해 무수한 이들을 학살한다. 그의 욕구는 기묘하다. 자신을 버림으로써 친구를 살린 그것은 분명 이타심이고, 자기 관계를 위해 그외의 인물들을 죽인 것은 확연한 이기심이다. 애국심의 또 다른 말이 국가 이기주의이듯, 이타심의 다른 말은 결국 이기심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디까지의’ 이기심을 용납해야하는지로 싸우는 것이다. 이기심에서의 ‘나’를 실체적 ‘나’로 제한할 것인지, 가족까지, 친구까지, 국가까지, 사회까지, 혹은 동물까지 허용할 것인지. 어디까지 ‘나’에 끌어들여야 그것이 ‘이타심’이라는 사회적 용인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내가 존중할 생명에는 한계가 있어.” -<진격의 거인>, 미카사 아커만-
미카사의 말대로, 인간은 별볼일 없는 존재라 무한히 ‘나’를 확장할 수는 없다. 무턱대고 확장한 자아는 보호가 아닌 파괴를 낳을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나’를, 이 이기심을 어디까지 뻗어나가야 하는지. 어디가, 나의 한계인지.
작품이 진행되면 될수록 시청자는 혼란에 빠진다.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는 일들의 연속이다. 싸우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하고. 정당한 혐오를 중지해야 한다. 유튜버 너진똑의 말대로, <진격의 거인>은 혐오의 정당성을 이야기한다. 각 인물의 시점을 살면서 그들의 증오가 ‘합리적’이라는 걸 깨닫는다.
많은 혐오와 차별은 정당하다. 샅샅이 살펴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래서 어렵다. 우리는 인류라는 이름으로, 윤리라는 이름으로 그저 ‘혐오는 나쁘다’는 감정적 비논리를 주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렌에, 미카사에, 아르민에, 엘빈에, 리바이에, 한지에 이입해 본 삶은 온통 혼동이다. 어지러움과 분통함이다. 이보다 더 좋은 답이 없을 것 같아서, 이게 최선인 것 같아서, 그 최선이 고작 이 정도라서 허무하고, 억울하다. 가족이 살해당했는데, 평생을 아파했는데, 용서를 강요받는게 분통하다. 왜 피해자는 피해자로 남아야 하는가. 왜 피해자의 혐오는 용납되지 못하는가. 복수가 어리석다고 말하는 이들의 발언은 얼마나, 그들을 외면한 말인가.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결국 나는 에렌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잔혹했고, 자신의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정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의 말이 자꾸만 생각난다.
“오늘은 불가능해도, 언젠가는…” -<진격의 거인, 한지-
지독한 현실에 그만 순응해버린 사람들을 존중한다. 그들의 발버둥으로 가득한 생을 존경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에 분노하며 멋 모르고 뻗어나가는 어린 이들을, 그들의 희망을 소망한다.